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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애사(戀愛史), 썸(something)만 2년

마누라가 보면 맞아 죽을 만할 이야기

by JJ

중년이상에게는 죽은 연애세포를 깨워 주는 차원에서, 청년들께는 연애를 응원하는 차원에서 나의 리즈시절의 이야기를 회상해 본다. 애초에 내 인생에 썸(something)이라는 건 없었다. 썸타며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 피곤했고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사귀면 연애하고 연애하면 결혼하고 결혼하면 애 낳는 공식과 같은 삶을 원했다. 사람들은 그런 정해진, 틀에 박힌 삶이 싫다고 하지만 나는 그 삶이 좋았다.


인생 살다 보면 3번의 기회가 온다고 하는데 사랑도 그런 것 같다. 첫 번째는 사랑인지 아닌지도 모르게 지나가고, 두 번째는 사랑인지 알고 있으나 안타깝게 놓치고, 비소로 세 번째 사랑에서 결실을 맺는다고 한다. 그리고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고 마지막 사랑이 되는 것이다.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스며드는 것이고 또는 한눈에 반하는 것이다. 결혼은 조금 다를 수 있다. 내게도 청춘은 있었으니 일말의 스킨십도 없었던 두 번째 사랑 이야기를 떠 올려 본다.


그 녀는 예뻤다

그 녀를 처음 본 것은 1997년 겨울 종로의 한 카페였다. 그때 나는 허리를 크게 다쳐서 치료를 받고 있을 때였다. 모든 세상에 어둡고 슬프게만 보이던 시절, 절망적으로만 보였던 시절에 가요계에 댄스가수가 나타났는데 나는 그 가수에게 큰 위로를 받았다. 그 녀는 그 가수의 팬클럽 회원이었다.


그 시절에는 비디오테이프를 녹화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그 녀는 가수의 방송을 녹화해서 내게 주기도 했다.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다 보니 그 녀에게 호감이 커졌다. 다행히 그녀도 내가 싫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당시 나는 힘들고 우울했다. 몸은 아파서 치료 중이었고, 직장도 없는 백수였다.


그녀는 유복했고 똑똑했다. 센스도 있어서 밥 값은 내가 내고 술값은 그 녀가 냈다. 그래서 자존심이 덜 상했던 것 같다. 몸이 회복이 되면서 첫 직장도 구했지만 쉽지 않았다. 적응하고 자리 잡는데 시간이 걸렸다. 다시 백수가 되었고 그 녀는 석사를 마치고 취직을 준비했다.




가을 어느 날 팬클럽 모임이 있었다. 종로의 술집에서 술을 먹고 술에 취해 극장에 갔다. 나는 그때 내가 그 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면 안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너무 늦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았다. 스물일곱 살이었다.


몸이 가면 마음이 간다는 말도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 녀를 알고 한 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그 녀를 안고 싶고, 만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녀의 집 앞 놀이터에 가서 밤새도록 이야기를 하고 스티거 사진도 찍었다.


드라마를 보면 그 녀의 집 앞 놀이터에서 이야기를 하던데 연애를 하면 자연스럽게 그런 장면들이 나오는 것같다. 일말의 스킨십도 없었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스킨십이 연애의 완성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랑을 스킨십이냐 비스킨십이냐로 나 눌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우린 팬클럽 모임에서 만났지만 사적인 만남은 거의 없었다. 그 녀의 집 앞 놀이터에서 만남이 처음이자 마지막 사적인 만남이었다. 어쩌면 그때가 연애의 절정인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려고 하고 메이드가 될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애타는 마음과 간절함, 불안함이 공존하며 설레는 것.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남도 아닌 애매한 관계로 2년간 시간을 보냈다. 그 녀가 나를 좋아했다면 그 감정의 크기만큼 시간들이 힘들었을 수도 있다. 기다려달라는 말도 가라는 말도 하지 않은 남자에게 지치지 않을 여자는 없을 것 같다.


어느 날 그 녀는 엄마가 아프다고 병원에 함께 가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혜화동 거리를 걷다가 운동화 끊임 풀렸는데 묶어 달라고 했다. 그런 요구나 물음은 관심이 없는 남자에게는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분명 지금보다는 용기가 없었다. 모든 것이 미숙한 시대였다. 나도 내가 그 녀를 얼마큼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가롭게 연애할 시간이 없다고 자꾸 나를 세뇌시켰다. 어쩌면 나도 이런 대답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기다릴게, 나는 괜찮아. 당신만 괜찮으면......


그렇게 2년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그 녀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리고 서로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은 채 또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용기 내어 전화를 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전화는 1번 만했다. 2번째 전화를 해서 연결이 되면 자연스럽게 통화를 할 자신이 없었다.


그 후로 세월은 다시 30년이 지났다. 한 번의 소심한 스킨십도 없었던 나의 찌질한 연애는 그렇게 막이 내렸고 희한한 건 지금도 가끔 그녀가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녀라기보다 그 시절의 내 청춘이라는 말이 맞을 것 같다.


추운 겨울 어느 날엔가 그 녀는 말했다. 대학 선배가 오랫동안 자신을 따라다닌다고 했다. 그리고 결혼하자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 말은 그녀를 지치게 한 나에 대한 마지막 경고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마지막 작별인사였을 수도 있다.


노래 "땡벌"의 가사가 생각난다.

난 이제 지쳤어요 땡벌~


그때 명확하게 깨달았다.

"여자를 기다리게 하면 안 된다"

기다리라는 말도 하지 않고 기다리게 하는 것은 더 잔인한 것이다.


그렇게 시작도 못하고 끝난 나의 연애사는 막을 내렸다. 2년 동안 썸(something)만 타다가 끝났다. 그 녀와 연애하고 결혼을 하면 결혼 생활이 경제적으로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로 인해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고, 최악의 경우 이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마음가짐, 정신 상태로 무신 연애가 시작되겠는가? 연애할 자격이 없었다. 하늘에서 돈다발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고생은 불가피했고 결혼 후 10년간 나의 가계(家計)는 실제 그랬다. 어쩌면 "나는 김치에다 밥만 먹어도 상관없어"라는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돌아보면 연애의 절정은 그때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썸을 타고 손을 잡을 때까지......

30년이 지나도 기억에 남는 것은 그런 순수한 기억들이다. 시작도 못해본 연애지만 그래서 더 아련한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살면서 수백 명, 수천 명의 사람들을 만났지만 유일하게 안부가 궁금한 사람이 그 녀다.


연애도 타이밍이고, 결혼도 타이밍이고 사랑도 타이밍이다. 좋아하는 일을 해야 인생이 즐겁듯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결혼의 질, 삶의 질이 좋다. 경험상 결혼은, 에로스가 강렬하지 않아도 두 사람이 원만한 성격을 갖고 있다면 충분히 잘 산다. 살면서 정들고 사랑도 커진다.


옛날에는 중매로 결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중매로 결혼 한 사람들이 오히려 이혼하지 않고 잘 산다. 나의 부모님 세대는 서로 얼굴도 안 보고 결혼했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도 이혼하지 않고 잘 사는 사람도 많다. 연애와 결혼은 그렇게 성격이 다른 것이다. 뇌를 결혼 모드로 바꾸면 그렇게 살아내는 것이 사람이다.


궁금하긴 하지만 아사코는 아사코로 남을 때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지금은 지금의 중요한 즐거움들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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