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영 Nov 01. 2020

다시 궁금해지는 타인이 내 삶에 하나 둘 등장한다.

바이칼 호수 일기 2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세르게이는 파랑새처럼 나타났다.


떠났던 바로 그 자리에서.




"알혼섬에 가면 세르게이라는 친구의 집을 찾아가봐. 여행자에게 캠핑할 수 있도록 마당을 내주고 있어." 


2년 전 알혼 섬에 찾아왔었던 명해 친구의 한마디, 그리고 주소만 가지고 더듬더듬 찾아갔던 곳에서 세르게이는 만나지 못하고 빅토르라는 친구를 만났다.

 그는 세르게이네 집 울타리를 기웃거리던 우리를 발견하고는 다급하게 소리쳐 부르며 캠핑할 곳을 찾고 있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니 따라오라며 잰 걸음으로 앞장서 근처의 캠핑 사이트로 데려갔다. 

긴가민가 하며 멍하니 서있던 우리에게 캠핑 사이트의 이모저모를 소개해주며 일출이나 일몰때 섭보드도 꼭 타보라고 했다. 얼기설기 지어진 캠핑사이트 구석에는 섭보드와 웻수트들이 널려 있었다.

 모든 건 무료, 단 원하는 만큼 '도네이션'을 하면 된다고 했다.


이 친구의 정체는 무엇인가, 세르게이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이런 호의는 무엇으로 부터 오는가. 그리고 우리의 성의는 얼마만큼의 '도네이션'으로 표현해야하는가.


우리는 혼란에 빠졌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아늑한 캠핑 사이트에서 따뜻한 밤을 보내고, 섭보드 위에서 멋진 일몰과 빅토르가 열정적으로 남겨준 사진까지 덤으로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첫 의문은 풀리지 않은 채로 삼일째 밤에는 새로운 곳에서 캠핑을 하기로 하고 텐트를 펼칠 만한 사이트를 찾아 열심히 돌아다 시작했다.





크지 않은 섬에서 커다란 배낭을 매고 텐트를 치려던 우리 무리는 너무 쉽게 눈에 띄였다.  이리저리 쫓겨다니다가 결국 제일 처음 찾아갔던 세르게이 집 마당 쪽으로 갔더니 웬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우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캠핑 사이트를 찾고 있다고 하니 빅토르의 사이트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고민하다가, 사실 그곳은 이미 다녀왔고 오늘밤은 우리만 쓸 수 있는 공간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럼 자기 집 마당을 쓰라고 하는 것이다.


그의 이름은, 세르게이. 


알고 보니 세르게이는 바로 이 앞마당에서 여행자들에게 여러 해 동안 캠핑 사이트를 제공해주었는데, 빅토르라는 친구 또한 여행자들을 위해 섭보드 체험을 비롯해 열심히 애쓰는 모습을 보고 여행자들을 위해 만든 캠핑 마스터 하우스를 넘겨주었다고.


그 후로 빅토르는 더 본격적으로, 더 많은 여행자들을 받고 있었는데 -도네이션 얼마해야 하는지- 우리의 치열했던 고민이 궁색하게 느껴질 만큼 그는 돈 같은 건 관심도 없어 보였다.



세르게이는 우리가 2년 전 찾아왔던 한국인 의렬의 소개로 찾아왔다고 하니 감격에 차서 보석같은 언어로 우리에게 축복을 한아름 남기고 사라졌다. 반야(*러시아식 건식 사우나-이또한 우리가 찾아 헤맸던-) 의 불은 지펴놓았으니 친구들의 사우나가 끝나면 마음껏 써도 좋다며. 여름에도 오돌오돌 떨 정도의 추운 밤날씨, 텐트를 치고도 비박을 하던 우리는 새벽 별빛 아래 땀이 쏙 빠지도록 뜨거운 반야를 신나게 즐겼다.


신이 찾아온다면 이런 모습일까? 우리는 새로운 혼란에 술렁였다.


어제 섭보드에서 만난 다니엘의 얘기를 들었다. 꿈은 없고 사계절의 바이칼을 느끼고 싶어 2년간 여기에 묵으러 왔다고.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여름에는 그런 북적한 시간과 새로운 대화를 즐기지만 봄, 가을에는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고. 


"꿈이 없다."

는 간단해 보이는 말도 내면의 단단한 고민없이 쉽게 내뱉진 못할테지. 생각을 안해봐서 없다고 하는 것과 오랜 생각 끝에 나온 말은 무게와 울림이 다르다. 

_
빅토르는, 세르게이는, 다니엘은, 어떤 마음으로 이런 일상을 보내고 있을까? 

내 앞뒤에서 걷는 이 친구들은 왜 여기까지 날아와 배낭을 짊어지고 이 길을 걷고 있는가. 

우리는 서로를 잘 알지 못한 채로 적당한 거리감 속에서 묵은 고민을 조금씩 꺼내어 보였다.


 다시 궁금해지는 타인이 내 삶에 하나 둘 등장한다. 

우연히 내 앞에 나타난 타인과 일상을 공유하며 조금씩, 그들을 알게 된 만큼 더 알고 싶어진다. 궁금해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 한때는 너무나 깜깜해서 무력하고 불안했는데 그들이 나의 마음에 작은 초 하나를 켜준 것 같다. 감사할 따름이다.

빅토르의 캠프사이트에서. 가운데가 빅토르, 가장 왼쪽이 다니엘. 


이전 13화 고독을 판매하는 고독지기가 된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