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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매한 인간 Apr 20. 2020

67. 내 감정노동 값은 따로 주세요 上, 下

<내 감정노동 값은 따로 주세요  上, 下>


오늘은 카페로 출근하는 날이다. 코로나 19로 인한 긴 휴점을 끝을 맺고, 지금은 영업시간을 단축해서 운영하고 있다. 밖은 비가 주륵주륵 온다. 출근길에 물웅덩이를 밟아 운동화가 젖었지만 기분이 좋다. 비 오는 소리를 들으니 봄이 오노라고 알려주는 것만 같다. 타닥타닥 유리창을 두들기는 빗소리와 재즈음악은 정말이지 환상의 조합이 아닐 수 없다. 얼음을 가득 담은 시원한 카페라떼 한 잔을 하며, 책을 읽어본다. 얼마만의 여유인지. 카페의 문을 열고 40분이 지나서야 손님이 들어왔다.


o 내 감정노동 값은 따로 주세요, 上

  - 내 신문지, 그리고 그보다 더 소중한 내 한 시간


그 손님은 두어 번 정도 카페에 방문했는데, 두 번 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키곤 했다.

'비 오는 날 나처럼 커피가 땡겨서 한 잔 하러 오셨나 보다.'

그러나 손님은 "여기 신문지 있어요?"라고 뜬금없이 묻는다. 유리를 포장해야 하는데 요즘 신문지가 구하기 힘들어 여기에는 있나 해서 찾아오셨단다. 나는 유리창을 닦으려고 꿈쳐두었던 신문지를 꺼내어 드렸다. 손님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느닷없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어떻게 해서 이 시골에 오게 되었는지, 본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 최근에 겪은 인간관계의 스트레스부터 시작해서 코로나 19에 대한 정부의 대처방안에 대한 문제점, 국회의원 선거 결과에 대한 이야기까지. 아. 정치 이야기는 가족끼리도 하는 거 아닌데.

다른 손님도 없는 데다 일단은 그분도 '손님'이라 나름 열심히 응대해본다. '아, 그렇군요', '어머!' , '아, 그래요?' 등등의 장단을 맞추며. 손님과 앉아서 대화할 수도 없고, 서서 응대하는데 벌써 1시간이 지나있다. 손님도 생각보다 시간을 지체한 것을 깨달았는지, 가벼운 인사와 함께 카페를 나선다. 아아. 손님은 그렇게 신문지를 들고 카페를 떠났다. 어떠한 주문도 없이!


손님은 언제든지 자유롭게 이 카페, 저 카페를 선택해 방문할 수 있다. 커피를 사 마실 건지 안마실 건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나는 고정된 장소에서 장사를 한다. 쉽사리 움직일 수 없는 몸인 데다 손님의 간택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라 늘 조심하고 친절하게 된다. 비록 신문지는 별거 아닌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지만, 그 신문지를 드렸을 때 어떠한 대가를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손님에게 응대하기 위해 소비한 내 감정이 조금은 아깝다. 내 감정노동에도 값을 매기고 싶은 씁쓸한 마음이 든다.


o 내 감정노동 값은 따로 주세요, 下

  - 일컵과 마주잡은 손


이건 6개월 전 이야기다. 그날도 어째서인지 비가 왔다. 50대 아주머니 한 분이 카페를 들어오셨다.

혼자 자취하고 있는 아들을 만나러 오셨는데, 아들이 아직 일하는 중이라 퇴근시간까지 기다려야 한단다.

꽃차를 진하게 우려 내드렸다. 아주머니는 적적하신지 말을 걸어온다.

"젊은 사람이 아주 참하게 생겼네. 어쩌다 카페를 시작했어요?"

묻는 질문에 대답을 거절하지 못하는 데다가 거짓말도 못하는 성격인지라 이실직고한다.

회사 다니다가 힘들어서 퇴사하고 카페 차렸다고. 아주머니는 깔깔 웃으면서 힘내라고 작은 응원을 해주신다.


나름 어색하고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깨졌는지 아주머니는 아들 이야기를 늘여놓으신다.

아들은 다음 주에 결혼을 계획하고 있는데, 너무 급하게 잡힌지라 예비 며느리랑은 한두 번밖에 못 보셨단다.

결혼을 천천히 하면 안 되겠냐고 말리지만 아들내미는 뭐가 그렇게 급한지, "그 사람 아니면 안 돼"만 외치고 있단다. 아들이 좋아 죽겠다는데, 결혼시켜달라고 아우성인데 어쩌겠나. 부랴부랴 결혼식을 서둘렀는데 그게 다음 주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아들이 퇴근해 엄마를 데리러 왔다. "안녕히 가세요!"


그런데 3시간 후 카페 문을 닫기 직전에 아주머니가 웬 여자분이랑 같이 오신다. 아주머니는 꽃차 2잔을 주문하고 카페 구석에 앉는다. 잠시 후 여자가 울기 시작한다. "저 결혼 안 할래요. 못하겠어요" 아주머니는 깊은 한숨을 쉬면서 달랜다. "왜, 우리 아들이 너를 서운하게 했니? 무슨 일이 있었니, 나한테 편하게 말해봐 봐."

여자는 더 크게 운다. 하필 냅킨은 저어어어어어 반대편에 있는지라 조심스럽게 냅킨을 테이블로 가져다 드려 본다. 여자는 잠시 울음을 멈췄다가 훌쩍거리며 말한다. "그냥.. 오빠랑 결혼은 천천히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아주머니는 여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차근차근 이야기를 들으며, 여자의 입장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살짝 엿들어보니 결혼을 준비하다가 다퉜나 보다. 게다가 둘 다 취업한 지 얼마 안 돼서, 사회생활을 하며 받는 스트레스를 서로한테 푼듯하다. 아주머니는 "사실 너희 결혼 너무 급하게 한다고 조금 천천히 하자고 말했잖아. 휴. 언제든지 네가 원하면 결혼은 멈춰도 돼. 어떻게 할래? 그만할까?" 둘은 긴 침묵을 이어갔고, 결론은 내리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갔다(그만큼 내 퇴근시간도 늦어졌다.)


10시 30분이 넘어가자 여자는 혼자서 더 고민할 수 있도록 먼저 돌아갔고, 아주머니는 앉아서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이어진 아주머니의 하소연. 처음에는 이런 일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다니 믿을 수 없었고, 그다음은 '설마 다음 주인데 진짜 파혼할까?' 하는 걱정에 손에 땀이 났다. 결국 선택은 그 둘의 몫이지만 부디 잘 해결되길 진심으로 바랬다. 11시가 지나자 목소리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한다. 퇴근시간도 훌쩍 지난 데다가 비가 와서 몸까지 축 처진다. 어째 어째 이야기를 잘 마무리해본다. 청소는 내팽게치고 집으로 퇴근을 서두른다. 아, 몸은 편한데 정신은 피곤하다.


정확히 일주일 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주머니가 카페에 들어왔다. 결국 결혼식은 무사히 잘 치렀고, 아들 자취방에 짐을 가지러 온 김에 카페에 들렸다고. 그때 이야기 나눠줘서 정말 고맙다며 손에 과일컵을 쥐어준다. 그때의 초췌한 얼굴은 생기를 얻어 행복감에 빛난다. 단아한 한복은 찰떡으로 잘 어울렸다. 하얀 손장갑 속 따뜻한 체온은 마주 잡아진 손을 통해 전해진다. 진심으로 고맙다고 웃는 아주머니를 바라본다. 그래, 그때의 감정노동은 이 '과일컵'하나로, 마주 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체온'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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