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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매한 인간 Apr 24. 2020

70. 후회되는 과거는 내 정체성입니다.

<후회되는 과거는 내 정체성입니다>


오늘은 카페 문을 닫았다. 서울, 정확히는 노량진에서 내 친구 '영이'가 왔기 때문이다.

내 친구 영이는 대학시절 내내 공부에만 파묻혀 살았다. 학점도 4.5점 만점에 가깝게 받았으며, 과제며 시험이며 바쁜 와중에 교직이수까지 했다. '선생님'을 꿈으로 정말,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달렸다.

그런데 이상하다. 영이는 벌써 임용을 6년째 준비하고 있다.

그토록 친했던 친구지만 임용 준비기간이 3년이 넘어가자 연락이 두절됐다.

친구에 대한 염려와 걱정, 그리고 섣불리 연락하는데 저어되는 마음 때문에 결국 연락이 끊겼다.

나는 그저 '좋은 소식 들리면 연락 주겠지', '무소식이 희소식이겠지'라고 치부했다.

그로부터 3년이 더 지나서야 나는 영이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내일 시간 돼?"


12시, 오늘은 영이와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장소는 무한리필돼지갈비집.

내가 먼저 도착하고 잠시 후 영이가 도착했다. 우리는 웃으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돼지갈비를 구워 먹는 두 시간여 동안, 우리는 단 한순간도 '임용'이라는 단어를 뱉지 않았다.

그 단어를 뱉으면 지금의 이 순간이 산산조각이라도 날 듯 위태롭고 조심스러웠다.

식사를 마치고 헤어지기 아쉬운지 우물쭈물하는 영이를 바라보다, 내 카페로 데려온다.

문쪽에는 커튼을 치고, 'closed'라는 팻말을 내건다. 오늘은 영이를 위한 카페를 오픈하는 날이다.


정말 나 열심히 살았거든.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왜 자꾸만 인생의 낙오자가 된 기분이 들까?
옆도, 뒤도 안 돌아보고 너무 앞만 보고 달린 걸까?
공부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내겐 그 흔한 컴퓨터 자격증 하나 없어.
흔해빠진 대외활동이며, 워킹홀리데이고 뭐고 그런 경험이 하나도 없어.
나 정말 공부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잘못 살아온 걸까?
내 앞으로의 삶은 무엇으로 살아갈까.

지금까지의 인생이 부정당했다는 듯 눈으로 울부짖는 저 친구를 바라보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괜찮아, 너는 지금까지 잘 해왔어. 다음 임용이 있잖아!'라는 그 흔해빠진 위로 하나 건네지 못했다.

과거를 끊임없이 후회하고,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하며, 불안한 미래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도 없는 저 친구.

나 또한 저 친구와 다를 바가 없음을 안다. 나 또한 내세울만한 특장점도, 이력도, 경력도 없다.


나는 런치에 올라오는 작가들의 프로필을 보다가 놀적이 많다. 여러 권의 저서를 저술하고, 출강을 나가고 그 와중에 본연의 일에는 충실한 수 많은 작가들. 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살고 있구나. 나는 지난날 뭘 하며 살았지. 후회를 일삼았다. 브런치가 꼴도 보기 싫었다. 비어있는 내 프로필의 이력이 나를 다그치는 것만 같다. 그렇게 나는 브런치를 접었다. 그렇게 일 년 정도가 지나서야 내가 쓴 글들을 차례대로 쭉 보게 되었다. 퇴사 후 행복감, 창업에 대한 불안감, 카페에서의 설렘, 그 모든 감정을 느끼고 있는 순간순간들이 담겨있다. 과거는 후회된다. 하지만 과거는 나의 인생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감정을 느끼며 '나'를 만들어온 순간들이다. 과거들은 곧 나의 정체성이다. 그걸 부정한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다.


나는 내 친구 영이에게 냅킨과 함께 달달한 밀크티를 대접한다.

시험공부를 하다가 뛰쳐나가서 밀크티를 사마시던 지난날,

밀크티에 쫀득한 펄을 추가해 먹었을 때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료'가 있었냐며 놀랐던 지난날,

지난 과거 속 행복한 순간순간을 되새겨보길 바라며 밀크티 한 잔과 투박한 말을 툭 건네본다.

"생각보다 살아가는 게 만만찮은 건 우리네만의 잘못은 아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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