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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매한 인간 May 19. 2020

81. 오늘 밤은 새 팬티

<오늘 밤은 새 팬티>


오늘의 카페는 한가하다. 이럴 때 카페 청소를 해둬야 한다. 여기저기 비치되어있는 소품, 책에 먼지가 어느새 쌓여있다. 먼지를 후후 털고, 책장을 닦고, 유리창에 앉은 꽃가루들도 신문지로 뽀득뽀득 닦아본다. 쭈그렸다, 일어섰다, 엎드렸다 하며 구석구석 열심히 청소한다. 그때 문밖에서 친구가 유리창을 통통 친다. "어! 지니야!" 친구는 목줄을 하고 있는 강아지를 가리키며 입으로 벙긋벙긋 말한다. '산책 다녀와서 커피 마실 게, 바닐라라떼!'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바닐라라떼에 샷은 투샷으로, 얼음은 가득가득. 친구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음료는 후딱 만들었는데, 강아지와 산책 나간 친구가 아직까지 안 돌아온다. 분명 강아지가 더 산책하고 싶다고 졸랐을 거다. 요 며칠 코로나 때문에 산책을 못했을 테니. 꽃가루가 이리저리 난리인 유리창을 마저 닦기 위해 쭈그려 앉아본다. 유리창 세정제를 칙칙 뿌리고, 신문지로 벅벅 닦는다. 집중하니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그때 친구가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야, 바지!"라고 말한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일어나서 허리춤을 주춤주춤 만져본다. 청소한다고 쭈그려있었더니 바지가 엉덩이골까지 내려가서 팬티가 보였다. 허겁지겁 갈무리하려고 바지를 끌어올리는데 손가락이 팬티에 걸렸다. 찢어진 고무줄 사이에 손가락이 훅 걸려서 '찌직' 더 찢어지는 소리가 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친구는 서둘러 고개를 돌린다. 친구는 못 본 척 강아지에게 말을 건다. "아이고, 우리 별이! 산책 잘했어?" 나는 애꿎은 티셔츠만 쭉쭉 늘려 내리고 서둘러 카운터로 간다. 친구의 얼굴을 똑바로 못 보겠다. 허둥지둥 바닐라 라떼를 전달하고, 친구가 하는 말을 그냥저냥 듣는다. 온몸에 열감이 느껴진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모를 대화를 대충 끝내고, 친구를 내보낸다. 친구가 가고 난 빈 테이블을 멍하니, 그렇게 멍하니 바라만 본다. 


손님이 아니라 친구여서 다행이다, 엄마 아빠가 안 봐서 다행이다고 다독여본다. 그러다 점점 나 자신에 대한 원망으로 바뀐다. 많고 많은 팬티 중에 왜 하필 찢어진 팬티를 입고 왔을까, 내일도 꽃가루가 쌓일 건데 뭐하러 유리창 청소를 했을까, 고까짓 다 헤진 팬티를 왜 버리지 못했을까. 나는 가난하지 않다. 소소하게 번 돈으로 소소하게 살아가고 있다. 가끔 다이소에 가서 2만 원 치 쇼핑을 하기도 하고, 영화도 보고, 책도 사 읽는다. 가끔 매출이 쏠쏠하게 나온 날은 치킨을 시켜먹기도 하고, 가정의 달에는 부모님 용돈으로 30만 원을 드리기도 했다. 나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부족함 없이, 만족하며, 감사하며,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그래, 그까짓 속옷이고 양말이고 헤지면 하나 더 사면 그만인데, 나는 왜 그 구질구질한 속옷을 계속 입고 있었던가. 


카페를 마무리하고 집에 와 거울 앞에 서있는 나를 바라본다. 손님들에게 찢어진 팬티를 들킬까 봐 윗도리를 매번 잡아당기다 보니 축 늘어져있는 면티가 보인다. 속상함과 창피함, 그리고 분노로 얼룩진 나를 바라본다. '오늘은 기필코 이 팬티를 버려야지'라고 마음먹어본다. 샤워하러 가기 전 벗은 팬티를 멍하니 바라보다, 다시 빨래통에 넣는다.  '그래, 한 번만 더입지 뭐. 안에 입는 거니까. 헤진 팬티는 집에서만 입으면 되겠지.' 며칠이 지나고 그 헤진 팬티는 빨래통에 갔다가 세탁기에 들어갔다가 햇볕에 잘 말려 다시 옷장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그 헤진 팬티를 입고 카페에 출근했다. 


출근길에 곰곰이 생각해본다. '나는 왜 창피함으로 얼룩진 이 헤진 팬티를 버리지 못하는가.' 헤진 팬티를 새 걸로 바꾸느니, 구멍 난 양말을 새 걸로 바꾸겠지. 보이지 않는 부분은 조금 낡고, 헤지고, 촌스럽고, 빈티 나도 괜찮다. 보이는 부분만 말끔하고, 깨끗하고, 정돈되고 아름다워 보이면 그만이다. 그런 생각으로 살아온 지난날의 흔적이 바로 이 '헤진 팬티'가 아닐까. 돈은 절약해서 좋지만, 익숙해진 헤진 팬티가 왠지 모르게 편하긴 하지만, 무언가 나 자신을 내면 깊이 사랑해주지 못한 것만 같아 조금 미안해진다. 나는 그 길로 시장에 들러 팬티를 한봉다리 사본다. 손에 달랑달랑 거리는 검은 비닐봉지. 마음이 묵직한 기분, 오늘 밤은 새 팬티를 입을 수 있다는 기분이 별거 아닌데 참 즐겁다.



p.s) 야밤에 제목때문에 깜짝 놀랐다는 구독자 겸 내 친구에게. 

"시장에서 사 온 팬티 하나 줄게, 새 팬티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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