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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룬 Jul 31. 2023

2023.7.8.-30. (9)

7.11.

불필요하고 무질서하며 손 닿지 않았던 공간이 재탄생한다. 나무 책장과 나무 책상을 놓고 책장 뒤엔 일인용 나무 스툴을 놓아 숨어서 책을 볼 수 있는 비밀 공간처럼 해놨다. 약간의 관심과 약간의 아이디어. 사람의 손이 약간 닿으면 같은 공간도 이렇게 멋지게 된다.


점심 먹기를 포기하고 들어온 도서관은 아주 고요하고 사람이 없다. 평일 대낮 점심부터 이런 곳에 와 책을 읽는 사람은 별로 없다. 바로 옆이 직장이라 지금 이곳에 올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회사 근처 도서관의 잡지컬렉션을 보고>>>

인생이 참 좋다- 고 생각한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부족한 잠에 여러 우울감이 복합적으로 올라왔는데.


어딘가 멀리 다녀온 기분. 역시 이런 공간에서 나는 위로받는구나 생각한다.


7.12.

머리를 묶은 사장님은 개구리 모양 스톱워치를 공구를 통해 도려낸다. 어찌 저리 작고 알찬 공구 꾸러미가 이런 곳에 있는지 모를 일이다. 이곳은 그러니까 다른 공기가 지배하는 세계. 가끔은 내게 익숙한 공기를 바꿔줄 필요가 있다. 그게 한갓진 일이고 돈을 좀 쓰더라도.


원래가 실패 없는 이 집의 라면 그리고 후식으로 먹은 처음 보는 브랜드의 커피맛 사탕, 좋은 스피커를 뚫고 들리는 유튜브 뮤직 클래식 노래.


집에서는 천도복숭아와 파리크라상의 초코크루아상을 먹었다.


7.19.

날 소화시키는 걸음은

어딘가에 빠르게 도착하려고 그 지점을 향해 걷는 걸음이 아니다.


7.20. <혼자 점심을 보내는 법>

딱히 하고 싶은 게 생각이 안 나는데, 지하 산책은 하고 싶지 않아서(어제 읽었던 책의 영향일 수도 있다. 원래 그 순환되지 않는 공기를 싫어했지만) 혼자 롯백 사탕, 젤리코너에 갔다. 오래간만에 독일어, 일본어, 영어로 쓰인 알록달록 사탕봉지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기분이 괜스레 좋아졌다. 빠다- 밀끄라고 쓰인 일본 사탕을 먼저 집었다가 유전자변형 대두가 포함되어 있다는 주의사항이 걸려 내려놓았다. 고심 끝에 세일해 천 원에 파는 소프트 커피 사탕 한 봉지를 사고, 또 고심 끝에 스리랑카산이라는 크림 얼그레이 티백 30개입을 샀다. (향긋, 담백-어제 읽은 책에서의 표현). 돌아와서 먹은 사탕과 티는 정말 취향에 맞는 맛이었고, 엄마가 싸준 체리까지 간식으로 먹으니 이번주의 피곤과 우울이 무색할 만큼 행복해졌다.


딱히 뭘 할지 생각이 안 날 땐, 하기 싫은 걸 거르는 방법이 꽤나 유효하다.


7.22

너무 많은 정보, 너무 많은 지식은 솔직한 대화를 방해하기도 한다. 거스르지 않으려 하는 그런 대화들.


7.23

매일 아침 스타벅스에서 20분 내지는 30분 동안 시간을 보내고 회사에 가보면 어떨까 생각하다가, 헤드폰을 낄 수 있는 계절에 실행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7.24.

크고 무거운 돌이 심장을 깊게 내리누르던 아침, 별거 아닌 일들도 전부 버겁게 느껴지던 점심, 그리고 온전한 내 시간을 지키려 퇴근한 여섯 시 반. 밥도 거르고 일찍 도착한 요가원에는 수련복 같은 걸 입은 맑은 얼굴의 매니저가 있고, 책을 들고 창가에 자리 잡은 나를 보며 lp인지 핸드폰인지 모를 것으로 음악을 틀어준다. 폭신한 털 방석과 기하학무늬의 양탄매트가 있는 곳에서 좋은 음악을 듣자니 책에 집중이 안 된다. 책에 집중을 못할 정도라면 그 공간이 강력했던 게 맞다. 그 공간의 공기와 창밖 풍경과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노래들이 한곡 한곡 틀어질 때마다 핸드폰을 들고 소리를 분석한다. 전에 없이 근육을 깨우는 운동까지 하고 나오니 몸과 마음이 누그러진다.


7.25.

5년 전에 살았던 이곳으로 다시 이사를 왔다. 해가 내려가고 완전히 어둠이 덮이기 직전, 그때의 산을 보는 걸 좋아하는데 그건 너무 잠깐이라 샤워를 하고 돌아오면 산은 어둠과 구분이 안되어버린다. 창문 너비의 1/4도 안 되는 그 일부의 풍경을 볼 때 나는 오 년 전 나를 다시 느낀다. 산은 기억한다. 그 당시 내가 무얼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열심히 추구했으며 무엇이 되고 싶었는지를. 정신없이 바빴던 내가 무의식적으로 내 자아의 핵을 삼은 일과 기억이 무엇이었는지를. 이곳에 와서 다시 느끼고야 만다.


7.26.

가만히 창 밖을 보며 누워있는 것.

퇴근 후 운동을 다녀온 후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고 느끼는 것.

정말 좋은 일, 느낌.


7.30.

남들에게 영향받지 않는 내가 좋다. 다들 여름에 어디 가냐, 어디 간다 질답을 해대도, 내가 딱히 생각이 없다면 듣고 넘겼다가, 공예 잡지를 들춰보다 알게 된 이타미 준 미술관을 너무 가보고 싶어 져 그때야 제주도행 비행기를 예매하는 내가 나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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