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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사이다 Dec 12. 2021

변태 같겠지만, 더 화내 주세요

여검사가 화를 다루는 법

재판을 하다 보면, 가끔 검사석에 앉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방청객들이 보인다. 한 번은 사람을 때린 피고인에게 징역 3년을 구형했는데 방청석에서 누군가 나에게 욕설을 하며 달려들어 법정 경위가 말리지 않았으면 큰일이 났을 수 있는 아찔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었다. 생각 외로 이런 일은 다반사로 일어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죄인들에게 형벌을 집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여자라고 약하게 보이면 안 된다고. 눈을 똑바로 뜨고 더 꼿꼿하게 앉아있었다. 시비 털린 공작새처럼 괜히 허리를 펴 내 공간을 넓혔던 것 같다. 속으로는 상처 입으면서. 혼자 있는 시간에는 깊은 슬픔을 느끼면서.


사실 그들은 피고인의 사랑하는 딸이거나, 철없는 친구이거나, 기다리는 연인이었다. 그들이 나에게 화를 내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내가 피고인을 처벌하지 않길 원해서. 하지만 나는 들어주지 않았고, 그 결과 그들은 내게 화를 냈다. 아니 정확히는 화를 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내 권한은 무겁다. 상대로 하여금 무력한 선택을 하게 할 만큼.


화가 정당하다는 것은 아니다. 검사들도 자존심이 세지만, 판사에게 화를 내는 것은 지혜로운 방법도 아니다. 피고인들 중에는 실제로 무례하게 굴어 구속이 되는 사람도 많다. 차라리 탄원서를 내거나,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사과를 하는 것이 훨씬 실용적(?)이다. 하지만 상대에게 강하게 원하는 것이 있는데 통하지 않을 때 약해진 사람은 화를 내기도 한다. 아마, 회사에서도 곧잘 화내는 상사를 잘 보면, 원하는 것을 상대가 주지 않아 상처 입은 사람일 확률이 99프로이다. 마치 우는 아기처럼 절박하다. 


'화'와 관련된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 성폭력 피고인의 변호인이 특이하게 피해자의 인스타그램 사진을 법정에 띄웠다. 그 사진들을 하나 하나 보고 마치 피해자가 평소 문란한 성생활을 하는 사람처럼 비췄다. 그의 질문은 점점 노골적이어서, 마치 증인인 피해자에게 잘못이 있는것 같았다. 그 순간 법정의 공기가 쎄해지고, 보다 못한 판사가 제지하자 변호사는 목소리를 높였다. “판사가 왜 제 질문을 방해하는 겁니까? 신빙성과 관련된 중요한 사항입니다!” 그 말에 방청석에서도 웅성거림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긴장감이 돌았다.

나는 말했다. “이런 식의 질문은 부적절하고, 2차 가해일수 있습니다.” 얼굴이 붉어진 판사도 동의하며 변호인을 제지하자 자존심이 상한 변호사의 얼굴도 덩달아 점점 붉어지고 불만섞인 얼굴로 의자에 앉았던 모습이 생생하다.


형량이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는 피고인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고, 결과적으로 선고된 형량은 그 사건의 평균보다 훨씬 무거웠고, 방청석에서는 피고인 가족의 나를 향한 적대적인 눈빛과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렇듯 법정에서는 말 한마디와 태도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중요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변태 같지만 상대가 화를 내면 오히려 기분이 좋을 때도 있다. 그만큼 내가 정당하고 엄하게 처벌했다는 것일 테니까. 죄가 있는데 검사의 처벌에 화가 나지 않는다면 죄의 무게에 비해 너무 적은 형벌을 내렸다는 뜻 아닐까? 


나는 아직도 사랑받고 싶은 여자아이이다. 하지만 여검사로서 나는 늘 사랑보다는 위협을, 감사보다는 원망을 받는다. 예전에는 그 화를 ‘나’라는 사람에 대한 개인적인 미움을 받아들이고 많은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판사나 변호사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에 누구도 그 사람을 진심으로 마주 보고 미워하는 사람은 없다. 나에게 피해 주려고 태어난 사람도 없다. 그저 삶이 힘들어서. 원하는 것을 그 사람이 주지 않아서 애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할 일은 같이 화낼 필요 없이 그저 줄지, 말지 다시 한번 숙고해서 결정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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