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기행 #8
밤새 눈이 내렸는지 길 가장자리에 얇게 흰색의 눈들이 보인다. 바람에 잔 알갱이처럼 굴러다니는 소금같은 눈이다. 벌써 1월도 중순인데 대구에선 눈을 볼 수가 없다. 눈오는 날을 기다리진 않지만 원채 눈이 없는 도시라 작은 흔적이라도 보이면 반갑기도 하다.
오늘은 울산지역 성당을 보기위해 길을 나섰다. 제일 먼거리인 성바오로성당부터 대구로 복귀하는 순으로 화봉성당, 언양성당, 인보성당 순으로 둘러보기로 했다. 10:30분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성바오로 성당에 도착했다. 고딕풍의 성당으로 1986년에 완공한 성당이다. 담쟁이 덩굴이 멋진 성당이지만 겨울이라 볼 수가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일정대로 성당을 들러보고 이날 순례의 마지막인 울주군의 인보성당에 도착한다.
울산 울주군 두서면 노동길 27에 위치한 인보성당은 2012년 한적한 시골마을에 세워진 현대식 건축물이다. 건물의 외관이 성당이라기 보다는 작은 기념관같은 느낌이다. 잿빛 콘크리트가 그 대로 드러난 투박하지만 세련된 질감. 그러나 그 회색빛은 건물을 무겁게 만들기도 한다. 더구나 이런 시골 마을에 이런 건물이 어울릴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요즘은 콘크리트를 그대로 노출한 건물들, 특히 카페로 이용되는 건물들은 많이 봤지만 성당에 노출 콘크리트를 쓴 것은 처음이라 이색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성당내부를 들여다 보면 완전히 반전된 모습이다.
인보성당의 내부는 그야말로 빛의 향연이다. 천장의 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빛줄기와 양옆으로 낸 창에서 들어오는 은은한 빛들은 인공적인 조명이 없어도 내부를 밝히기에 충분할 듯보였다. 흰색벽면에 부딫히는 빛들이 내부를 그야말로 경건하며 은혜롭게 한다. 빛이 만들어내는 정적이다. 소란스런 밝음이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 침묵을 강요하고 영혼이 맑아지는 밝음이었다.
제대의 십자가를 비추는 빛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성부의 뜻이었음을 알리듯이 위에서 아래로 사선을 그으며 내려온다. 그래서 제대와 회중석의 빛의 농도는 확연히 다르다. 마치 연극의 무대처럼 보이기도 한다.
성당에서의 빛의 질감은 일반적인 건물들의 빛과는 다르다. 태초의 빛, 혼돈속에서 질서를 만드는 빛이기에 밝음만을 주는 빛이 아니라 어둠을 물리치는 속죄의 빛이며 대속의 빛의 형상화라는 생각이 든다.
독특한 십자고상과 은은하게 빛을 통과시키는 십사처는 황혜선 작가의 작품이라고 한다. 황혜선 작가는 1992년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빛을 이용한 간결한 조소작품을 많이 창작한 작가라고 한다. 어떤 연유로 이런 시골 성당에 자신의 작품을 놓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절한 선택이지 않았을까 . 십자고상의 뒷쪽에 비스듬이 누운 벽면에 십자고 상의 그림자가 흐릿하게 여운으로 그려진다. 빛과 그림자를 이용한 작품을 창작하는 작가의 의도다. 영혼의 잔상같은 그림자가 보는 이에 따라 여러가지의 형상으로 다가온다. 내게는 예수님의 가시면류관 같은 느낌이다. 아마도 내속에 지은 수많은 죄스러움 때문에 그런건 아닌지 하여 송구하다.
인보성당의 감실은 제대에 있지 않고 회중석 오른쪽 조그만 공간에 개방된채로 놓여있다. 앞쪽엔 의자가 몇개 놓여 있다. 아마도 감실의 성체앞에서 기도할 수 있게하려는 배려같아 보였다. 감실 상자엔 오병이어의 문양이 그려져 있다. 낮은 천정엔 십자가를 음각으로 표현해 놓아 그곳에 조용히 앉으면 온 마음을 다한 기도의 마음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인보성당은 이렇게 여러가지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소품들이 적절하게 곳곳에 놓여있었다. 성수대와 성유의 전시도 이채롭고 마당 한켠의 성모상과 공소시절의 종탑도 작지만 은혜로웠다. 그리고 성당앞의 공간은 담이 없이 그대로 개방되어 누구나 이 곳에 오라는 듯 지역주민에게 공유되어있다.
성당을 나와 돌아오는 길, 돌아오는 길에도 자꾸만 뒤돌아 보게하는 성당이다. 다녀온지 3주가 넘었지만 매주 미사에 참석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성당을 건축한 신부님의 많은 생각과 고뇌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파격은 언제나 시작이 어려운 법이다. 어쩌면 반대하였을 신자나 교구신부님들도 계셨을 텐데 설득하고 밀어부친 정창식 신부님의 기도가 상상이 되었다. 이런 성당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