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기행 #50
1865년 흥선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프랑스의 힘을 빌리려 합니다. 이를 위해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조선교구를 통해 프랑스인 신부에게 은밀하게 접촉을 시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교구장이었던 시메옹베르뇌 신부는 정치와 종교의 분립을 원칙으로 한다는 자신의 소신을 조선의 조정에 전하게 됩니다. 이로써 흥선대원군의 생각은 무산되었고 때마침 러시아의 통상요구도 사그라들어 유야무야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천주교에 대하여 사교나 사학이라 하여 배척하던 시기여서 이를 빌미로 신정왕후와 유림들의 대대적인 비판을 마주하게 됩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로서 자신의 입지가 줄어들 것을 염려하여 이런 혐의를 벗고자 마침내 천주교에 대하여 유래 없는 탄압을 하게 됩니다.
1866년 병인년의 시작은 이런 정치적 이유로 시작되어 천주교의 마지막 박해이자 수천 명의 순교자가 발생한 가장 큰 박해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베르뇌 주교 등 9명의 프랑스 신부들과 수많은 신자들이 잡혀 순교하였으며 1866년을 시작으로 8천여 명의 신자가 처형되는 등 전국적으로 불어닥친 천주교 신자의 검거열풍은 1871년까지 이어져 약 6년간 조선의 신자가 멸절될 정도로 큰 위기에 처했던 박해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교인들은 박해를 피해 산간오지나 바닷가 등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고 이로서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던 산간오지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천주교는 이를 계기로 오히려 신자 수가 더욱 늘어나게 되는 하느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금광리 공소 역시 박해를 피해 서울이나 경기도, 그리고 경상도 지역에서 피난온 사람들의 교우촌이 그 모태가 되었고 향후 영동지역에 복음의 첫 씨앗을 뿌리는 최초의 밀알이 되었습니다. 숨어 지내던 교우들은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의 체결로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자 1887년에 처음 공소를 건립하게 되었고 1921년에는 교세가 확장되어 본당을 건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금광리 공소 당시 신자수는 약 100명가량 되었으며 이후 신자수가 증가하여 본당으로 승격하게 되었습니다. 초대주임신부로는 이철연프란치스코신부님이 부임하였고 이후 금광리 본당이 주문진으로 이전하여 1949년 봄에는 금광리 공소가 현 위치, 현재의 모습으로 이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강릉 도심에서도 약 30분가량을 빠져나와 남강릉 IC가 인접한 조그만 어단마을의 도로변에 위치한 금광리공소는 빨간색지붕을 머리에 이고 단아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먼 데서 찾아온 순례자를 반겨주었습니다. 잠겨져 있지 않은 철제 대문 앞에서 수선화가 곱게 핀 공소의 앞마당과 세월이 느껴지는 공소를 잠시 바라보았습니다. 누군가가 항상 정성을 다해 보살피고 가꾸고 보수하여 허물어지지 않은 건물, 특히 그런 공소를 보는 감회는 항상 새롭습니다. 신앙의 선조들의 믿음이 유전자가 되어 대대로 이어오면서 지나간 역사를 정신에 새기고 몸에 새기며 공소를 늘 자랑거리로 삼고살아가는 공소신자들. 그들의 따듯한 마음과 믿음의 손길을 가슴깊이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75년을 이어오면서 군데군데 보수한 흔적은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마룻바닥은 한걸음 한걸음 옮길 때마다 삐그덕 거리며 세월의 소리를 내고 있었고 회중이 앉는 의자도 그 옛날 그대로 인 것만 같았습니다. 아직도 고해성사가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작은 고해소의 모습은 참 따뜻하고 정겨웠습니다. 작고 작은 공간 조그만 창호지 문을 사이에 두고 저편에 계신 사제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시골공소사람들을 떠올려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공간이 더욱 아늑하게 보인 건 창호지문 위에 걸린 십자고상과 오직 나 하나와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만 존재할 것 같은 공간일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6시가 가까울 무렵 다시 정원으로 나온 우리는 지붕 위 십자가에 걸린 낙조를 보았습니다. 빨간색 지붕과 절묘하게 어우러진 석양의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강릉의 초당성당과 금광리 공소를 순례하기 위해 아침 일찍 떠나온 400여 Km의 긴 여정이 금광리 공소에서 바라본 석양의 아름다움과 공소에 핀 수선화의 고고한 자태와 함께 마무리되었습니다. 다시 대구로 돌아오는 먼 길은 공소의 아름다운 기억으로 인해 전혀 지루하지 않은 귀로의 길이 되어 주었습니다. 매달 첫째 수요일 오후 두 시에는 공소미사가 있는 날입니다. 아직 한 번도 공소에서 미사를 참례한 적이 없으나 미사시간에 맞추어 꼭 방문하고 싶은 공소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