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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안 Jul 26. 2021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그건 나만의 특권이었다.


'사실 나 고민이 있어. 이거 너한테만 얘기하는 건데...'

'더프는 자기 얘기를 잘 안 하는 거 같아'

'대신 남의 얘기를 엄청 경청해. 그리고 잘 공감해 줘.'

 중고등학생 때는 거의 말 수 없는 아이였다. 점심시간 아이들과 나누는 스몰톡이라는 것도 어색했고, 내 얘기를 꺼내봤자 우중충한 얘기들뿐이어서 입을 잘 열지 않았다. 내가 유일하게 활력이 생기는 주제라곤 아이돌 얘기뿐이었다. 그 외에 평소 나의 성격은 차분했고 조용했으며, 어쩜 남들에겐 조금 음울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친구가 많진 않았지만 유독 속 깊은 얘기를 털어놓는 아이들이 많았다.

 처음부터 얌전한 아이의 기질로 태어난 건 아니었다. 뇌를 여는 큰 수술을 받고서도 나는 밝은 일곱 살이었다. 나보다 키가 훨씬 큰 링거 거치대를 신나게 밀며 신경외과 병동을 쏘다녔다. 여러 환자들과 친구를 먹었고, 환자 어르신들 앞에서 재롱을 곧잘 부렸다. 활발하고 맹랑한 성격에 병실 메이트 중 친구를 먹은 대학생 언니도 있었다. ‘함’씨라는 특이한 성만 기억나는 그 언니는 백혈병이었다. 내가 먼저 퇴원했는지, 언니가 먼저 퇴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아무튼 누가 먼저 퇴원을 하고서도 한동안 우리는 친필 편지를 주고받았다. 90년 대 후반이었으니 그럴 시절이었다. 중요한 건 생각보다 투병이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치진 않았단 거다. 친화력이 좋고 밝은 아이였다. 10살 이전의 나는.

내 성격의 변화는, 나의 투병보다도 엄마의 별세가 컸다. 10살 2월,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침에 일어나니 엄마와 아빠가 없었다. 시골에서 부랴부랴 친할머니가 올라오셨다. 엄마 아빠가 없는 3일간 할머니가 우리를 대신 봐주셨다. 연신 눈물을 찍으시면서 우리 새끼들 어쩌누, 등의 한탄만 하시면서. 영문을 몰랐다. 어떤 직감에서였는지, 물어볼 수 없었다. 엄마 아빠가 사라진 그 새벽, 자다가 갑자기 코마 상태에 빠진 엄마를 아빠가 발견해 119를 불러 서울 아산병원으로 옮겼다는 것, 그리고 3일을 중환자실에서 뇌사상태로 버티다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빠는 그 집에 더 이상 살 수 없었는지 아예 지역을 옮겨 이사를 했다. 나는 느닷없이 엄마와도 헤어지고 친구들과도 헤어졌다. 모든 환경이 변하니 적응하는 것만도 벅찼다. 그때 성격이 급격히 변했다. 아무것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새로운 지역에서, 처음 보는 친구들과 새롭게 친분을 형성해야 하는 일도 어려웠다. 애착형성과 사회화가 되어야 할 시기에, 이미 친한 아이들끼리 무리가 나뉜 상황에서, 어디에 껴야 할지 몰랐다. 준비물을 몰라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는 일도 많았다.

그런 와중에 아빠는 1년 만에 재혼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은 사람이 죽으면 3년 상을 치른다고 했는데, 1년 만에 새엄마와 재혼이라니. 사랑이란 게 이런 건가.

엄마 쪽의 외동딸이었던 언니는 나보다 한 살 많았다. 순식간에 두 동생이 생긴 첫째가 되었고, 첫 째였던 나는 갑자기 둘째가 되었다. 새로운 가족이라며 우리는 한 집에 살았다. 그 집은 내겐 어디서 주워온 나무판자를 엉성하게 쌓아 올린 위태위태한 개더링, 남들에게 보여줄 용도인 허울로 느껴졌다. 아기돼지 삼 형제 중 첫째 돼지가 만든 지푸라기 집 같았다. 언제든 후 불면 날아가 없어질 그런. 그 정도로 애착이 없었다. 새엄마는 우리를 '열심히' 키웠다. 사랑해서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책임감 때문이라고 느껴졌다. 편모 가정과 편부 가정이 결합한 재혼가정, 어딘가 엉성하게 결합된 ‘가족’이라는 울타리 하나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것처럼 보였다. 성격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온통 혼란뿐이니 나의 자아는 안으로 숨어들었다. 삶이 온통 흑백이었다. 사랑을 믿지 않는 10대를 보냈다. 내게 사랑이란 정의는 곧 덕질이었다. 그래서 아이들과 덕질 얘기 말고는 할 얘기가 없었다. 아픈 몸으로도 꺄르르 웃으며 병동을 쏘다니고, 남자애들 사이에서 골목대장을 먹었던 그 애는 이제 사라졌다.


엄마와 언니, 그리고 아빠. 그들에 대한 양가감정 때문에 늘 머리가 복잡했다.  새엄마는 나를 살뜰히 챙겼지만 어딘가 어려워했고, 늘 언니만 애틋해했다. 티를 내려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같이 싸워도 아빠는 언니의 편을 들었다. 모든 게 혼돈이었다. 엄마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가 갑자기 동생이 두 명이나 늘어난 언니는 얼마나 억울했을까. 이해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나도, 그때는 엄마의 사랑이 필요했던 나이었다. 내 친동생은 다섯 살로, 하나부터 열까지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기였다. 언니는 순식간에 모든 관심을 막냇동생에게 빼앗겼다. 나는 겉으로는 최선을 다해 엄마 노릇을 하지만 사실 마음으로는 늘 언니만 챙기는 엄마에게 질투가 났다. 청소년기 내내 엄마에 대한 인정 욕구로 가득했다. 언니가 삐딱하게 나가면, 나는 더 말을 잘 듣고 열심히 공부했다. 사고 하나 치지 않는 모범생으로 자랐다. 그래야 더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대완 다르게 엄마는 늘 언니만 싸고돌았다. 몸이 아픈 것보다, 사랑을 받지 못한 게 더 아팠다. 아프면서도, 한편으론 같은 피가 아니니 어쩔 수 없다고 늘 스스로를 다독였다.

 새엄마가 일터에 가고 내가 학원에 가있는 동안, 6살이나 많은 언니가 이제 고작 자기보다 반 밖에 안 산 유치원생을 한겨울 베란다에 가두었단 사실은 동생이 15살이던 해 알았다. 9년 전 일을 기억하며 덤덤하게 얘기하던 중2 동생. 우리 둘 다 초등학생이었을 때 나에게는 칼부림을 했었던 언니니, 충격을 받았지만 한편으로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다만 분노는 혐오가 되었다. 타깃 없는 혐오가 집을 향했다. 그저 동생을 데리고 어떻게 해야 집을 나갈 수 있을까 생각했다. 마침 서울로 대학을 다니고 있었으니, 어떻게든 가출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평탄할 줄만 알았던 대학생활은 스물한 살 때 다시 무너졌다. 세 번째 투병 이후 겨우 복학해 또다시 왕복 다섯 시간을 견디며 인천에서 서울로 통학했다.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자취를 시작하는 건 꿈도 못 꿨다. 겨우 첫 회사에 취직하고 나서야 악착같이 월급을 모을 수 있었다. 5개월 동안 월급의 60%씩 모았다. 그렇게 모인 건 달랑 500만 원. 그 돈만 가지고 상경을 했다. 드디어 그 집에서 벗어난 순간이었다. 15년 만에 허울뿐인 가족에서 탈출한 것이다. 이제 겨우 고등학생이 된 남겨진 동생. 에 대한 죄책감은 애써 모른척했다.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 했다.


 한편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막무가내로 살던 언니는 만난 지 얼마 안 된 남자 친구와 혼인신고를 했다. 부모님이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건 9개월 만이었다. 그것도, 임신을 했다는 것부터 알면서 뿌리가 드러난 사실이었다.

엄마는 큰 충격을 받았고, 한동안 둘의 불화가 지속되었다. 나는 둘의 문제에 끼는 게 싫었다. 한동안 외면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본가에 내려가지 않았다. 동생은 여전히 두 고래 사이에 낀 작은 새우였다.

그러다 사건이 터졌다. 임신을 한 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졌단 소식이었다.

 아픔은 나만의 것이었다. 사랑받을 수 없던 나는 아픔을 이용해 새엄마에게 관심을 받았다. 내가 엄마의 시선을 독차지 할 수 있는 수단은 아픈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수단마저 빼앗겼다. 내 유일한 특권마저 빼앗기고 만 것이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이후 나에겐 두 번의 수술이 더 있었다. 그때마다 병실엔 나 혼자였다. 새엄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간병인을 썼다. 70대의 노인으로, 생판 남에게 뒤치다꺼리를 맡기기가 불편해 사실 있으나 마나였다. 엄마가 2~3일에 한 번씩 병실을 들르긴 했지만, 30분을 넘기지 않았다. 다시 일을 하러 가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언니가 아프기 시작하자 엄마의 행동은 달랐다. 하던 일을 모두 관두고 언니 옆에 꼭 붙어 간호했던 것이다. 나는 그 해에 모든 걸 인정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뼈를 에이는 고통으로 깨달았다. 모든 사랑을 포기했다. 더 이상 엄마에게 사랑받으려 몸부림치지 않기로 했다. 최소한의 예의만 지켰다. 사람의 마음에도 총량이 있다. 이젠 더 이상 그들에게 쓸 수 있는 마음이 도저히 없었다. 사랑받고 싶은 욕구마저 없어졌다. 언니는 뱃속의 아기 때문에 당장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아기는 예정보다 조금 빨리 세상에 나왔고, 그제야 두 번의 수술을 연달아 받을 수 있었다. 서울에서 일을 하는 나에게 엄마는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해 언니가 불쌍해 어쩌냐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안타깝긴 했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제 팔자 제가 꼬았다는 생각뿐이었다.

 언니의 병증이 큰 스트레스였는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엄마도 뇌출혈이 왔다. 이로써 5명 중 3명이 뇌혈관이상으로 투병을 하게 됐다. 그것도 두 명은 한 해에.

 뇌출혈로 돌아가신 친엄마의 기억 때문에 또다시 혼란스러웠다. 새엄마마저 돌아가시면 이 가족은 어떻게 되는 걸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딸로서, 동생으로서 할 도리는 해야만 했다. 병실에 찾아가는 것조차 나에겐 트라우마였는데 그건 나 개인이 아팠던 트라우마이기도 했고, 내가 아팠을 때는 방치당하다 언니가 아프니 바로 병실을 지키던 엄마의 모습 때문에도 그랬다. 그래서 병문안은 각자에게 딱 한 번씩만 갔다. 역시 바쁘다는 핑계였다. 대신 돈을 보냈다. 쓸 마음이 없어 돈이라도 썼다. 이렇게라도 도리를 하는 거라고, 이렇게 해서라도 여태 키워준 빚을 갚는 거라고, 내 마음을 꽁꽁 붙들어 맸다. 내겐 갚을 거라곤 도리와 빚뿐이었다. 사랑이란 단어는 들어올 틈이 없었다.


 몇 년이 지나 조카가 세 살 반이 넘어갔을 때였다. 두세 달에 한 번씩은 온 가족이 본가에 모여 저녁을 먹었다. 독립을 하고 나서는 본가에서 하루도 잔 적이 없다. 늦게 내려가 늦은 저녁을 먹고, 조금 앉아있다가 집으로 돌아올 뿐이었다. 그곳은 더 이상 내 집이 아니었기에, 6시간 이상 있으면 알레르기가 났다. 그래서 그날도 저녁만 먹으러 늦게 내려갔다.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데, 느닷없이 언니가 어린애처럼 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너무 미안해. 그때 네가 아팠을 때 얼마나 아픈 줄 몰랐어. 내가 아파보니까 그제야 알게 되더라. 그동안 내가 너무 미안했어’

엄마도 연이어 사과했다.

아파보니까 알게 되었다고. 그때 네가 얼마나 아팠는지. 더 많이 신경 써야 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머리가 멍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해묵은 애증, 억울함, 서러움에 울컥했지만 ‘아 뭔 소리야 갑자기~ 밥이나 먹어!’라며 애써 농담조로 넘겼다.

그리고 서울 집으로 돌아와 울었다. 혼자서, 하염없이.

그건 이 세상의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함이었다.

 조카가 없었을 때 언니의 연락이 올 때는 오직 한 가지 목적뿐이었다. 요구 사항이었다. 돈을 빌려달라, 아니면 어디에 간 김에 뭣 좀 사다 달라. 그래서 나는 언니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톡이 와도 몇 시간이 지나 못 봤다며 둘러대기 일쑤였다. 그런데 요새는 조카라는 매개체가 생겨 둘만의 연락이 잦아졌다. 평소처럼 몇 번을 안 받았는데, 조카가 보고 싶어 해서 전화했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는 더 외면할 수가 없었다.  조카가 자꾸 영통을 걸어온다. 신기하게도 나는 해준 게 없는데 조카가 그렇게 이모를 찾는단다. 조카가 입이 트이고 나니 이모한테 가자며 대뜸 생떼를 쓰기도 하고, 무작정 전화를 해서 이모 언제 오냐고 따져 묻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끼리의 스몰 톡도 어색하게 시작되었다. 생전 안 하던 개인 톡으로 안부를 묻기도 하고, 무언갈 자꾸 더 챙겨주려고 한다. 조카가 잘 시간이 지나도 또봇이나 뽀로로를 계속 보려고 해, 이러면 이모 못 만난다고 하니 곧장 방에 들어가서 눈을 감았다는 말을 듣고는 맘이 무척 복잡했다. 세 살 난 아기에게서 맹목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한 사랑을. 따뜻함인가, 애틋함인가, 조카가 예쁜 건 사실이지만 마음이 어지러웠다. 


무엇보다 신기했던 건

밥상 앞에서 휘뚜루마뚜루 지나갔던 미안하단 한마디에

언니에 대한 20년의 응어리가 순식간에 녹았다는 사실이다.

 가족들에게 나는 늘 전화를 받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먼저 전화를 걸어서 실없는 소리를 하기도 하고 별일 없는지 묻기도 한다. 모두가 한번 씩 아파본 입장이 되어본 것, 그래서 나의 아픔을 진정으로 이해 받은 것, 그리고 무엇보다 조카의 탄생이 나를 가장 변화시켰다. 우리를 '동거인'이 아닌 진짜 '가족'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세상엔 남보다 못한 친가족도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를 지키려 각자의 방식대로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늦게 알았다. 내가 아플 땐 엄마가 언니를 붙잡고 내 걱정을 그렇게 했다는 것도, 시간이 엄청나게 흐르고 나서야 알았다. 나에게 식칼을 겨누고 어린 동생을 추운 베란다에 가뒀던 기억은 변함없지만, 여자 대 여자로서, 사람 대 사람으로서 바라보니 그저 언니도 불쌍한 사람 1이었던 걸 알았다. 내가 특히 몸이 많이 아팠을 뿐, 사실 우리는 모두 상실을 겪은 사람들이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모여 가족을 이뤘으니, 삐걱대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했을 테다. 각자의 마음에 상처가 있었지만 결국 모두가 투병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결국 서로를 이해하는 '진짜 가족'이 되었다.

 사람의 마음엔 총량이 있다는 믿음엔 변함이 없다. 하지만 방전이 되면 끝인 줄로만 알았던 마음이 아주 사소한 계기로 완충이 되기도 한다는 걸 30년을 살다 보니 깨달았다.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40살까지 살 수 있을까. 그때 되면 또 어떤 인생의 진리를 깨닫게 될까. 평생 언니를 용서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이의 뱃속엔 둘째가 숨 쉬고 있다. 첫째 때와는 다르게 부디 순산하기를, 진심으로 빈다.




여전히 성도 다르고 언니란 호칭도 안붙은 채 저장되어 있지만,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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