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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나무 Nov 28. 2020

내 안의 우울을 인정하기까지

'세상 걱정은 다 짊어지고 있던 것 같았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힘들었던 것이 티가 났구나. 싶었다. 내가 우울했던 것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구나 싶었다. 애써 감춘다고 감췄는데도, 행복한 모습들을 진열하면서 열심히 감추었는데도 느껴졌나 보다. 내가 써둔 지난 글들만 읽어봐도, 우울과 걱정과 후회가 묻어있음을 느낄 수 있다. 긍정적이려 애쓴 흔적들도 찾을 수 있을 테고.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에게는 우울이 없는 줄 알았다. 나는 낙천적이고, 망각이 빠르고 긍정적이라서 우울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우울해왔다. 우울했고, 우울했다.


우울증일까. 스스로 진단해보면 ''이라는 병명으로 포장하기에는 작게 느껴진다. 그러나  속에 항상 우울이 있던  같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우울이 있었다. 예전에는 우울한 사람은 루저라고 생각했었다. 우울증에 걸리면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자기감정 하나 컨트롤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리석었다. 감정컨트롤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느끼고 채우는 것이었다. 약해서 우울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서 우울한 것이었다. 어쩌면 우울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울을 대체할 단어가 없기에,  자리에 있는 것인데.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울하다.


왜 사람들은 하나같이 아플까. 마음이 아프고, 생각이 아프고, 반응이 아프다. 지나온 삶이 주는 무게가 무거워서, 쓰고 있는 가면이 얇게 느껴져서 그런 것일까. 세상이 너무 아프다. 나도 아프다.


나의 아픔을 인정하기 전에는, 아프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만 보였다. 그러니까, 아픈데 감춘 사람들.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만 보인 것이다. 사람이 포장지로 사용한 학벌, 집안, 인맥 등의 거치레만 본 것이다. 학벌이 좋으면, 열심히 공부한 비상한 머리가 있는 줄 알았고. 집안이 좋으면 가정교육을 잘 받을 것이라 예상했다. 인맥이 넓으면, 인맥을 통해 부자가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모두 허상이었다. 학벌이 좋아도, 그 학벌을 가지기까지의 과정에서 받은 상처와 아픔들이 있었다. 학벌 위에 학벌을 향한 열등감도 있었다. 좋은 집안에서 좋은 가정교육을 받으려면, 건강한 어른이 있어야 했는데 아픈 어른들이 있는 집안에서 건강한 교육은 있을 수 없다. 인맥은 더더욱이 허상 중에 허상이고. 나의 아픔과 우울을 인정하곤 달라졌다. 사람들의 아픔이 보인다. 감춰진 내면이 느껴진다. 말에서 행동에서 감추고 싶은 과거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뭐 어떻게 아냐고 묻는다면, 우연이라 말하고 싶다. 우연히 읽은 것이다. 읽어봐서 읽힌 것이다. 익숙해서 느낀 것이다.


아끼는 동생과 존경하는 형과 셋이 깊은 대화를 나눴다. 우리는 종종 만나 사회와 경제, 종교와 정치를 깊게 다룬다. 사실, 얼마나 깊겠냐 싶겠다만 각자의 생각과 제안, 조언에 거침이 없다. 그 사이에 서로를 향한 다정함이 있어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건강한 모임이다. 그날도 여전히 건강한 대화를 주고받던 중이었다. 아끼는 동생이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야기의 시작은 연애였고, 동생은 스스로의 자존감이 높아질 때 연애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말에 진심으로 공감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의 연애는 서로를 향한 인정을 갈구하고, 인정이 채워지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기에 연인이 아닌 것이고. 이 이야기를 하면서, 동생이 꺼낸 말은 이랬다. "두 분은 어디서나 잘하시고, 느끼시지 못하겠지만.." 존경하는 형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알았다. 형도 나도, 동생도 건강한 이야기를 나누고 다정한 사이이지만, 우리들은 한참 모자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사실은 말이야.."라는 말로 시작하여 교환학생 시절 홀로 앉아 울었던 이야기를 전했다. 내가 울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나를 싫어하고 있던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는 나의 행동, 삶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스스로를 혐오하고 있던 것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데, 타인에게 사랑받으려 애썼던 어리석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날 나는 나의 자존감 수준을 체감했고, 내가 혐오하는 지점을 줄여가고 있다. 물론 아직도 부족하지만 말이다. 나의 이야기가 끝나자, 형도 말씀하셨다. 어떻게 언제나 완벽하겠냐고, 자신도 지금은 건강한 이야기를 나누지만 동네 친구들과 만나면 여전히 저급한 말들을 쏟아낸다는 고백이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동생은 이야기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우리 셋은 사회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이 맞다. 각자의 단점과 약점이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보이는 것만 본다면 건강한 것이 맞다. 그러나 우리들의 보이지 않는 부분은 아프다. 세상적으로, 사회적으로 건강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아프고 우울함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럼 질문이 생긴다. 왜 모두 아프지? 하나님은 왜 모두 아프게 창조하셨지? 아닌가? 창조될 때는 완벽하게 건강했나? 잠깐만. 정말 선악과 먹은 그 죄가 지금껏 내려오고 있는 건가? 수 천년이 지났는데도? 뭐지? 하는 질문들이 이어지고, 답은 나오지 않는다. 인간이 모두 아픈 이유를 안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싶다. 우리 사회 속 사람들은 정상인 것 같다가도, 갑작스레 분노하고 화를 분출한다. 화를 내는 것을 아프다 할 수 없으나, 이상한 포인트에서 화가 난다는 점은 이상한 것이다. 정확하게는 화내지 않아도 괜찮을 때, 분노를 표출하고 싶어서 화를 내며 이에 더해 분노의 대상이 정해지면 쏟아 낸다는 것이다. 이런 특성은 인터넷에서 더욱 광범위하고, 악하게 나타난다. 불특정 다수가 있는 곳에서, 대상으로 지정되면 매몰될 때까지 땅을 판다. 결국 묻어 버리겠다는 심산이다. 대상이 된 이유가 있을 테고, 그 이유는 사회적 악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비난을 마땅히 감내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적은 정의 구현이 아닌 매몰에 있기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아프다는 증거이며, 반증이 된다.


나의 우울과 아픔을 인정하고 나의 삶은 더욱 건강해졌다. 우울을 감추기보다 우울을 즐기고, 다스리는 방법을 찾는 중이다. 갑작스레 우울이 깊어졌을 때 우울을 통해 느끼는 감정을 타인에게 표출하기보다, 건강한 방법을 찾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는 셈이다. 러닝이라던가, 글을 쓴다던가, 맛난 음식을 먹는다던가. 정확한 방법은 없겠지만, 우울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은 있는 것 같다. 우리 사회, 우리네 사람들이 그 방법을 함께 찾았으면 좋겠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우울하면 우울하다고 말하는 건강한 사회를 꿈꾼다. 아프면 청춘이라는 문장이 욕을 먹은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아프다. 아픈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안 아픈 것이 비정상이다. 그럼 이제 다시 질문이 시작된다. 아픈 게 정상인 사회에서, 아픔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그 시작점은 아픔을 인정하는 것이라 제안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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