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쳐간 문장들과 번뜩였던 소재들을 보내주었다. 하나의 문장이 가지는 힘을 알기에, 한 문장에서 시작한 글의 가치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노트북 앞으로 나오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삶이 변화한 까닭도 있을 것이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이 되면 퇴근하고. 다른 업무를 하더라도 반복이라는 것이 내게 안정을 주었나 보다. 걸리는 것이 없었다. 하고 싶으면 했고, 보고 싶으면 봤고. 나 홀로의 시간을 견디며 묵묵히 지내왔다. 언제나 오늘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오늘이 아무것도 아닌 나를 달래려 과정 중에 있다고 생각했다. 과정 중에 있어서 괜찮다고, 나를 달래면서 왜 아무것도 아니냐고 마음에게 물었다. 미래를 준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채찍을 휘두르고 있던 것이다. 채찍질에 상처는 나지 않았다. 그래서 보이지 않았다. 채찍은 몸을 지치게 했고, 정신을 흐트러 놓았다. 몸을 눕게 했고, 마음을 쓰지 못하게 만들었다. 몸과 마음이 뉘인 상태로 살아간 것이다. 반쯤 죽어있던 것이 아닌가. 추락하는 것 같았다. 추락하고 있는 것 같았다. 끝까지 떨어질 것 같았다.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보였다. 반쯤 죽어 몸도 마음도 쓰지 못할 때, 정신이라는 것이 있었나 보다. 추락할 운명이라면 발버둥 치지 말고 비행을 해보자는 제안이었다. 눈이 번쩍. 반쯤 죽어 있던 것이 아닌가. 사람들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것은 부끄럽다는 반증이며, 눈빛이 죽었다는 것은 정신 소멸의 반증이다.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모두 반증이며 누군가는 읽고 있다. 반증이 비언어라는 사실. 글을 쓰기까지 죽었다 깨어나기를 반복. 지금은 살아 있는 것이 맞을까.
사람마다 독서의 방법이 있겠다만, 나의 독서의 방법을 소개하고 싶다. 나는 다독을 한다. 그러나 완독률은 저조하다. 다양한 책을 조금씩 읽는 것이 나의 방법이다. 그래서 중고서점을 사랑한다. 마음껏 자유롭게 읽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책 한 권의 기승전결을 이해해야 책을 읽었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지구에서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 권의 책에서, 한 줄만 읽어도 독서가 맞다. 심지어 나의 블로그에서 하나의 글만 읽었어도, 그건 독서가 맞다. 물론 책은 아니다만, 뭐 그럼 이북은 책이 아닌가 하는 것이지. 아무튼. 두꺼운 책을 아무리 읽어도 한 문장도 남지 못하는 상황과 짧은 시에서 마음이 울리는 것 중 무엇이 가치 있는 일인가 묻는다면, 당연히 후자가 아니겠는가. 나의 독서법은 마음의 울림을 찾는 과정이다. 오늘도 중고서점에 다녀왔다. 한국에서 중고서점이 있는 곳은 꽤나 번화가이거나 유명한 거리들이 대부분이다. 중고서점도 사업이라 좋은 목을 찾아 입점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도 할 것이 많은 곳이다. 그러나 내 발길은 언제나 중고서점으로 향한다. 서점을 한 바퀴 돌면서 오늘 읽어볼 책을 하나씩 골라잡아 읽어갔다. 여러 책이 내 손을 거쳐갔다. 그러다 한 권의 책에 종착했다. 어디서 봤지 했는데, 같은 사무실을 쓰는 분의 책상에서 본 책이었다. 제목은 몰랐는데, 표지 디자인이 인상적이어서 기억이 났다. 나는 그 책을 잡아 목차를 살펴봤다. 완벽하게 기승전결을 가진 책이었다. 주제는 부와 관련된 경영서였다. 부와 돈을 다루는 책들은 결론이 정해져 있어서, 결론을 강화하기 위해 서론 본론을 가득가득 채워둔 경향이 있다. 뭐 모든 책이 그렇겠지만 말이다. 그 책의 제목은 지금도 기억이 안 난다. 그리고 찾아볼 생각도 없다. 다만, 오늘 내게 남은 문장은 '자기 인식'이었다.
부자들은 자기 인식을 한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못하는지, 무엇이 부족한지 '자기를 인식'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부자들의 인터뷰를 넣고, "저는 사람들이 자기 인식을 하지 않아서 놀라워요!"라는 말을 인용한다. 자기 인식. 쉽고도 어려운 일인지라, 어려운 일을 싫어하는 우리들이 하지 않는 영역인가 보다. 그러나 내게 와 닿은 이유는 조금 다르다. 나는 자기 인식을 자주 하기 때문이다. 뭐 내가 부자가 될 운명인지는 모르겠다만. 내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알고, 내가 잘하는 분야로 나가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다. 그러나 자기 인식 영역에서 내게 부족한 점이 있었다.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서 성공한 사람과 나의 차이점.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바라보는 방향의 선구자들을 떠올렸을 때, 그들에게서 부지런이 보였다. 나도 한 부지런 하긴 하는데, 평범의 영역 속 부지런이 아니었다. 9시에 자고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조간신문을 읽고 아침을 거하게 차려먹는 수준의 부지런이었다. 이 정도가 아니더라도, 꾸준한 운동이라던가 시간을 아끼는 것들. 내게는 없는 것이었다. 영상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잠자기를 좋아하는 내게는 먼 이야기로 다가왔다. 하루하루 잘 일어나서 출근 잘하고, 약속 시간 안 늦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해도 되지만, 하면 내게 득이 되는 행동들을 말하는 것이다. 내게는 없다. 그들에게는 있다. 이것은 차이였다. 사실 그래서 노트북 앞에 앉았다. 차이를 기록하고 느끼고 싶어서 앉았다. 현재 내가 바라보는 방향은 여러 갈래이긴 하다. 아직 탐색기에 있기 때문이고, 성향 자체가 탐험가 인지라. 노트북 앞에 앉은 것은 작가라는 사람과 나의 차이였다. 작가들이 게으르고, 약과 술에 취해 글을 쓰던 시기를 지나갔다. 건강하고 바른 글이 세상에 통하고 있다. 내가 추구하는 작가주의는 건강함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나도 건강한 글을 꾸준히 쓰려한다. 나는 자기 인식을 자주 한다고 밝혔다. 나는 내가 글을 써야 함을 알고 있다. 종종 떠오르는 소재와 플롯들을 기록해야 함을 알고 있다. 소설을 쓰면, 너무 형편없을까 봐 주저하고 있는 것을 잘 안다. 나의 소설을 비웃을까 봐 쓰지 않는 것을 안다. 모르면 좋은 텐데, 알아서 못 쓰고 있다.
"벽을 눕히면 다리가 된다." 엄청난 문장을 만났다. 벽을 눕혀 다리로 만들어 건너가라는 의미다. 한 문장에 엄청난 힘이 담겨있다. 최근 강연을 보고 마음에 남은 문장인데, 자기 인식과 큰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인식의 출발은 내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벽을 인식하는 것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내게 수많은 벽이 있다. 그중 하나는 글이 읽히고, 비난받을지도 모른다는 지질함이다. 지질하게 두려워하는 그 벽을 눕혀서 건너가야 한다는 것이다. 강연에서 만난 엄청난 문장과 우연히 읽게 된 책에서 남은 한 줄이 나를 어디로 인도하고 있는 것일까. 방향이 보인다. 내게 벽을 눕힐 힘이 있을까? 연사님은 다리를 건너도 벽이 있다고 말했다. 인생은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그러나 다리를 건넘 후 벽을 만나면 두려워하지 말고, 조금씩 두드려 보라고 하셨다. 그러다가 눕힐 수 있으면 다리로 만들어 건너가라고. 복잡한 세상에서 희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적절한 예시가 아닐까. 매일 맞이하는 나의 벽. 그로 인해 작아지고, 반쯤 죽은 상태로 살아가는 현대인. 벽에 갇혀 숨쉬기 어려운데, 막상 눕히고 건너가면 별것 아닐 것이라는 희망. 뭐 그런 것 아닐까.
내가 정말 좋아하는 래퍼인 로꼬가 제대를 했다. 로꼬 형이라 부르고 싶은데. 로꼬 형이 입대 전에 냈던 '시간이 들겠지'라는 곡을 무한 반복했었다. 그게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흘러 형이 제대를 했다. 그리고 발매된 형의 앨범. 총 4곡인데 모두 무한 반복 중이다. 마음에 남는 문장이 많은데, 그중에 "이제 어른이 된 것 같아"라는 문장이 깊이 남았다. '이제 별거 아닌 것 같아'라고 말하고 이어지는 어른이 된 것 같다는 고백은 '지나왔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로꼬 형에게 군대라는 존재는 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모두 벽으로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눕혀서 그 과정을 지나오니, 별것 아니라 말할 수 있던 것이다.
그 벽을 건너는데 과정이 꽤나 길지도 모른다. 1년 8개월 정도 걸릴지도 모른다. 소설이 완성될 때까지 몇 년이 걸릴지, 몇 시간이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을 중하지 않다. 건너고 있다는 것은, 이미 벽은 눕혀졌다는 뜻이다. 벽을 건너고 있다는 것은 이미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