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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상희 Nov 30. 2023

깨를 볶다

내가 볶은 건 아니다.

김장 때 깨를 왕창 쓰고 냉동고에 봉지에 담아 둔 깨를 꺼냈다. 당연히 볶은 깨라고 생각하고 꺼내보니 볶지 않은 깨였다. 지난번 외숙모한테 받아왔지만 먹던 깨가 있어서 이제야 볶지 않았음을 확인한 것이다.


그것도 일이라고 며칠을 미루다가 오늘에서야 깨를 볶기로 했다. 깨를 볶은 적이 꽤 오래전이라 기억을 더듬었다. 조리가 있어야 했지만 우선 있는 것들을 활용하기로 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부엌일에 관심이 많았다. 엄마나 이모가 하는 것을 자세히 보아두었는데, 본 도둑질을 할 수 있다더니 딱 내가 그렇다. 


깨를 볶으려면


1. 키가 있어야 한다. 키에 깨를 넣고 잘 까불러서 티끌을 날린다.-키가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키가 있어야 할 만큼 티끌이 대단히 많지도 않았다. 외숙모가 잘 골라 주셨나 보다. 대충 큰 티끌을 골라내고 나머지는 깨를 물에 담아 위에 뜨는 것들을 골라 버린다.


2. 조리가 있어야 한다. 전에는 쌀도 꼭 조리로 일어서 돌을 골라냈다. 지금은 조리를 쓰지 않으니 촘촘한 채를 이용해서 돌을 골라냈다. 아주 작은 돌과 모래들이 나와 걸러냈다. 깨끗해 보여도 꼭 해야 한다.


3. 서너 번 돌을 돌라내고 깨끗이 헹궈서 채에 받쳐 물을 뺀다.


여기까지 하고 나니 내가 나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오늘 오전에 교육이 있기 때문인데 생각보다 깨가 많아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러나 나에게는 남편이 있다. 남편은 빵쟁이였다. 깨도 볶아서 썼었고, 찹쌀도 찧어서 찹쌀도넛을 만들었고, 팥앙금도 직접 만들던 사람이다. 남편에게 부탁했다


4. 자기야, 오늘 당신 어디가? 아무 데도 안 가면 지금 하고, 만약 나가야 하면 꼭 하고 나가주셔. 깨를 볶기만 하면 됨. 우선 깨를 볶기 전, 납작한 깨 사진과 다 볶은 후의 노릇노릇 색깔이 변하고 통통해진 깨 사진을 나에게 보낸 후에 볼일을 보셔. 당신은 선수니까, 깨를 볶는다는 것이 기름을 붓고 볶는 게 아닌 거는 아실 테고. 카하하


전에 남편이 빵집을 할 때 아르바이트생에게 깨를 볶으라고 줬더니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볶는 바람에 난리가 났었단다. 그 이야기가 떠올라 농담 한마디 건넸다.

남편은 때깔 좋게 볶은 깨 사진을 보냈다. 잘 볶았다. 어찌나 양이 많은지 웍으로 두 번이나 볶았다고 했다. 사진을 접수한 나는 남편의 외출을 허락했다. 같이 볶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깨 볶는 부부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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