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의 모래사장에서 철퍼덕 주저앉아서 철없이, 미래도 모르고, 막무가내로 쌓던 모래성이, 이제는 바람에 깎이고, 파도에 무너지고, 길가는 사람에 치이고, 그러다가 아슬아슬 깃발만이 서있을 때, 그때 어느 순간 뼈대조차 한마디 한마디 아름다운 손이 다가와서 내 깃대를 잡아줬어. 별 거 아니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한 순수 소비야. 당신의 소비가 시간과 공간의 한계 없이 내게 무한으로 주어질 때, 나는 그걸 사랑이라고 할 거야. 아름다움이라고 부를 거야.
내가 내 바짓자락을 붙들고 늘어진 영혼들을 떨쳐내고, 그것들이 당신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는 것이 두렵지 않다면, 그냥 당신은 나를 안아줘. 그 영혼들이 입 벌려 나를 잡아먹으려 소리칠 때, 내가 그들의 아구 속에 당신과의 사랑을 집어넣을 때, 들려오는 심상치 않은 괴성에 내 귀를 막아줄 수 있다면 당신, 그냥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줘. 나는 그렇다면 영원히 당신 곁에 있을 테니까. 나는 이제 혼란스러운 세상을 벗어나서 그냥 사랑과 꿈만으로 살고 싶어.
사랑에서 도망쳐. 윤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