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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요절

by 윤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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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록색에서 흑남색으로 변해버린 밤의 동해를 보고 있자니 이 모든 것들이 다 운명으로 느껴진다. 요절하지 않으려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 거라고 당부했던 점쟁이의 말이나, 넌 물가를 피해서 살고 먹고 자야 한다던 외할머니의 말이 생각난다. 밀물 때에 맞춰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웅크리던 영화 속 서래의 모습 옆에 나란히 누운 내가 또렷하게 보였다. 지금 당장 홑가방 속에 든 엽서 몇 장의 디자인이 마침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인 게 다행인 데다가, 필기감이 끝내주는 간이만년필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짜릿하다.


정성껏 쓴 유서를 소리 내어 읽어줄 친구들과 장례식에 조문 올 사람의 이름을 한 명씩 셈하고 있으니, 지금 이 순간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운명으로 정의 내려진다. 생이 끝에 다달았음이 분명하다. 확신이 차오르는 동안 왼쪽에서 점차 오른쪽으로, 마침내 내 시야의 중앙에 위치한 조업선의 불빛이 여기가 수평선이라고, 여기가 너의 종착점이라고 내게 고함친다. 일 년 동안 못 본 나의 엄마가 서울에 오기로 한 날이 2주 뒤인 14일이고 오늘은 유월의 첫째 날인 것조차 완벽하다고 여기면서, 모래밭에서 일어나 옷자락을 털고 앞으로 걷는다.


언제나 근심에 차있는 얼굴을 보면 난 또 죽을 용기를 잃어버릴 테니까, 1일인 오늘, 더할 나위 없이 딱 죽기 좋은 날을 어쩜 이렇게 잘도 골랐는지. 흡족한 마음으로 물에 발을 담근다. 사랑이라고 부를 만한 이들이 너무 많아 머리가 무거운 나는 금세 물에 잠긴다. 버거운 사랑의 이름들은 내 정수리를 가만히 누르고 내 몸은 작은 암초가 되어 흙바닥에 박힌다. 동해가 푸르게 빛나고 아침이 찾아오면 내게도 파도가 다가와 부서질 거고 그렇다면 나는 철썩하고 작은 울음을 울 것이다. 낭만의 울음을.



바다와 요절. 윤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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