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다닐 날보다 다닌 날이 더 길어졌다. 직장은 무작정 버틸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떠나는 상상을 자주 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의든 타의든 언젠가는 회사를 떠나야만 한다'는 걱정이다. 책에다는 '사원도 임원도 언젠가 회사를 떠난다'라는 말을 호기롭게 써놨지만, 막상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휑해지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회사를 너무 사랑하거나 회사형 인간이라서가 아니다. 메슬로우가 말하는 인간의 욕구 중 3단계의 욕구 본능인 '사회적 욕구' 때문이다. 믿거나 말거나.
과거를 돌아보면 지금처럼 나이를 먹지도,벼랑 끝에 가까워지지 않았을 때도 늘떠날 준비를 했다. 굳이 떠날 필요가 없는데, 왜 그렇게 떠나고 싶어 안달했던 걸까. 과거를 찬찬히 되짚었다.가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화가 넘칠 때속으로 격노하면서 조용히 떠날 채비를 했다. 순간적으로 마음을 비운 거다.그런 순간이 많지는 않았지만, 결국 떠나지 못했다.
순식간에 '제삼자'가 되는 오묘한 기분 때문이었다. 당장떠나겠다는 혼자만의 다짐은 일순간 나를 제삼자로 둔갑시켰다. 실컷 즐길 만큼 즐기고 나서 일어나 엉덩이를 탁탁 털고 떠나면 그만인 구경꾼이 된 기분이랄까? 작은 결심이 나를 '회사 일에 직접 관계없는 사람'으로 만들곤 했다. 이런 감정에 심신을 맡기면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못마땅한 회사에도, 억지 부리며 화내는 상사에게도, 진상 떠는 선배에게도, 꼴 보기 싫은 동료에게도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것이다.
결정된 것도 달라진 것도 없지만 '난 이 회사를 떠날 거고, 당신들 같은 진상과도 이별이다'라는 감정이입에 심취했기 때문이다. 이런 위태로운 순간순간을 고비고비 넘기면서 십 수년간 같은 직장에 머물고 있다. 실행보다는 마음이 두어 박자 앞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조금 더 솔직히 고백하자면 박차고 떠날 만큼 용기도없었고, 더 좋은 곳으로 옮길능력도 부족했다. 용기를 내기보다는 안주했고, 능력을 갖추기보다는 눈치만 점점 더 키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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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차고 넘칠 때마다 제삼자가 되는 일을 반복하니 관대 해지는 법을 터득했다.
하지만 괴로움과 불행을 꾸역꾸역 삼키며 마지못해 남은 건 아니다. 화가 차고 넘칠 때마다 제삼자가 되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관대 해지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삼자 효과 덕에 나는 십 수년간 숙성됐고, 성숙해졌다.
'참을 인(忍) 자를 붙이고 다니랬다'나 '참는 게 아재비다'라는 말, 참을 인(忍) 셋이면 살인도 예방해 준다는 말은 그저 속담 속 허풍이 아니다. 신랄한 현실 속 실전에서 적당한 분노 조절로 후회를 예방한 전적이 많다. 제삼자 효과를 통해 스스로 터득한 방법이 나를 여태껏 버티게 한 뿌리다.
물론 이 모든 건 내 안에서 남모르게 지지고 볶고, 싸우고 휴전하는 전쟁일 뿐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인고의 과정을 거치며 정제된 마음을 되찾았다. 더불어 내가 갑자기 제삼자로 변신해 많은 이에게 베푼 관용은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늘 안심하고 또 안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순간순간 마음에 들어차 넘치던 화가 나를 제삼자로 만들어 여태껏 버티게 해 줬으니까.
모두가 잠깐 스쳐 가는 정류장 같은 회사에서 우리는 왜 그렇게 분노하고 자신을 몰아붙일까?
가끔 자신이 속한 복잡 미묘한 세상에서 살짝 비켜나 구경꾼이 되는 건바람직한 일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바라보며 판단하라는 판에 박힌 말이 아니다. 그저 때때로 내 삶에서 치열하게 벌어지는 일들을 남일 보듯 심드렁하게 바라보자는 것이다. 일상에 꼬여 시달리던 그 심대한 일들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잠깐 스쳐 가는 정류장 같은 회사에서 우리는 왜 그렇게 분노하고 자신을 몰아붙이며 살까. 결국 구경을 끝마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날 그곳, 희미한 흔적조차 제대로 남지 않을 곳인데. 찰나의 삶이다.분노보다는 희열을 더 느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끔 여유로운 구경꾼이 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조급함을 버리고 심드렁한 제삼자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