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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id Oct 17. 2019

두려움에 쩔쩔매는 우리

'두려움이 걷히면 가증스러울 만큼 태평한 마음이 온다'


참 우습다.
현재의 고민도,
다른 선택으로 발생했을 인생도 
모두 오지 않은 미래의 기우일 뿐이란 게.


사는 게 두렵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지금은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크다. 언제 사회에서 쫓겨날지 모르는 비참한 심경을 품고 사는 가장의 무게랄까. 누군가와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도 도울 수도 없는 나만의 책임을 앓고 있음을 실감한다. 내 이런 어리석은 푸념에 한 후배가 똘똘하게 말해줬다.


"누가 강요하거나 시켜서 한 거 아니잖아요. 어른인 선배가 스스로 결정한 인생이잖아요. 뭐."


경쾌한 목소리의 명쾌한 답변이었다. 혼자였다면 지금처럼 쪼들리지 않고 넉넉하게 살 수 있다. 그렇다고 두려움이 없었을까. No! 또 다른 막연한 두려움이 사방에 포진해 나를 괴롭혔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참 우습다. 현재의 고민도, 다른 선택으로 발생했을 인생모두 오지 않은 미래의 기우일 뿐이란 게.


생각해 보면 요즘에만 이런 기분을 느꼈던 건 아니다. 어릴 때는 그 시절만의 두려움을 품고 살았고, 성인이 되어 갈 무렵에는 좀 더 현실적인 두려움에 직면했다. 가장 혈기 왕성했을 때는 입시, 취업, 결혼 등이 가장 커다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이 역시 오지 않은 미래의 기우였다. 시간이 지나니 뭐가 됐든 어느 정도 해결이 됐다.


"나치가 유대인을 증오한 건 두려움이었. 두려움이 박해의 이유지. 두려움이야 말로 우리의 진짜 적이니까. 두려움이 우리 세계를 잠식하고 있어. 두려움은 우리 사회를 통제하는 수단이 되어가고 있지. 이것이 정치인들이 정책을 펼치는 방식인 거야. 광고업계가 우리에게 필요 없는 물건을 강매하는 방식이지."


영화 <싱글맨>의 주인공 조지(콜린 퍼스)가 자신의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두려움'에 대해 쏟아낸 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심경과도 같은 자신의 진짜 심경을 덧붙인다.


"늙어가고 혼자가 된다는 두려움. 쓸모없는 존재라는 두려움.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무도 관심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미지 출처 : pixabay>


두려움은 순환하고, 사소한 두려움 두려움을 증폭한다. 무서운 팩트 폭격이다. 짧은 대사 안에 우리를 잠식하는 모든 두려움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늙고 낡아져서 회사에서 잘리고, 집에서는 쓸데없는 존재가 되고, 무슨 말을 하든 무시당하고, 자식들이 등 돌리고 혼자가 된다는 두려움에 대한 시나리오. 하지만 역시 오지 않은 미래다.


사회에 나오면 특히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커진다. 남자라면 군대에서 힘든 사람을 겪어 본 경험이 있겠지만, 사회는 곱절 이상 냉혹하다. 좀 더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수직구조를 비롯한 고용과 피고용에 대한 명확한 선 때문일까. 막강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졸업하고 취업했지만 또다시 시작된 끝없는 경쟁의 굴레 때문일까. 주류가 되면 그 자리를 놓칠까 봐 두렵고, 비주류라고 느끼면 남보다 뒤처진다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려움이라는 적이 삶을 점점 더 척박하게 만든다.


현실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대놓고 위협하지 않는다. 이 모두가 자발적으로 양산한 두려움을 자신의 가슴과 뇌에 새겨 넣을 뿐.


두려움의 동의어는 무서움, 겁, 근심, 공포 등이다. 다시 말해 두려움은 부정확한 예측이다. 불특정 다수의 악성 댓글 공격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연예인도 오랜 기간 인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시달렸을 것이다.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상황을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두려워하는 삶의 리바이벌. 두려움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활짝 열어 놓고 기다리는 참담한 모습, 우리는 왜 두려움에 이처럼 집착할까.


그런데 경험을 통해 알다시피 두려운 상황이 닥치거나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으로 복귀한다. 시간이 지나면 특정 두려움은 매끄럽게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두려운 마음에 또 다른 두려움을 찾아 나선다. 조금만 깊게 생각면 두려움은 내 안에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내가 부지런히 창조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다. 다가오지도 않은 두려움에 대한 확신을 털어버리는 여유가 시급하다.


두려움이 파괴적인 건 홍수나 태풍을 기다리 듯 명확한 준비를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바람이 몰아 치기도 전에 스스로를 파괴해 버린. 서운 자멸이다. 그런데 허망하게도 두려움이 걷히면 가증스러울 만큼 태평스럽고 개운한 기분을 느낀다. 두려움이 멈췄을 때의 심상을 자주 떠올릴 필요가 있다. 반복되는 근거 없는 두려움 때문에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휘황함을 황망하게 빼앗기며 살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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