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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id Oct 15. 2019

악마의 악담에 일희일비 않기

'부아 가득한 검은 기억을 훌훌 털어내는 지혜'


그들과의 관계와 실재를 기억에서 
지워버리지만, 쓸데없는 기억 소환에 능한 
엄마를 만나면 도로아미타불이다.


마음에 생채기 낸 말들은 빨리 털어 내려고 노력한다. 심기 불편하고 짜증 나는 이야기들을 수시로 기억 저편 깊숙한 곳에 넣어 봉인해 버린다. 그런데 최근 일들은 수시로 깜박하는 엄마가 수십 년 전 기억을 부시시 꺼낼 때가 왕왕 있다.


엄마가 고관절 수술을 해서 열흘 간 꼬박 붙어 있었다. 지금도 거의 매일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2007년 결혼 후 이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한 건 처음이다. 자연스럽게 모자간 대화가 늘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면 엄마의 국보급 기억력에 감탄하곤 한다. 엄마는 내가 잊고 싶어 꾸역꾸역 삶 저편으로 밀어내 봉인 기억을 순식간에 해제는 능력자였.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픈 달갑지 않은 친척 이야기를 자꾸 꺼냈다. 친척도 몇 없지만 치가 떨릴 만큼 싫은 인간들이 있다. 수시로 그들과의 관계와 재를 기억에서 지워버리지만, 쓸데없는 기억 소환에 능한 엄마를 만나면 도로아미타불이다.


내가 이들을 이토록 싫어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만나기만 하면 악담을 퍼부어대기 때문이다. 또렷한 최근 기억이 있다. 3년 전쯤 외면할 수 없는 엄마의 간곡한 부탁으로 친척의 칠순 모임에 참석했다. 아주 오랜만에 얼굴을 들이민 자리였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그동안의 내 세월을 취조하듯 캐내기 시작했다. 궁상맞게 살지 않는 모습이 못마땅했던 것일까. 대기업에 다닌다는 내 말에 패색 짙은 표정으로 죽거다.


"XX그룹 요즘 별 볼일 없지 않나? 문제 많고? 그리고 요즘 대기업은 오래도 못 다니잖아."


그들과 상반됐던 궁색한 시절은 없었던 듯 거침없이 잘 살고 있다는 답변을 하던 중 역전 패했다. 수십 년 전 자기 집 일층에서 전세살이 하던 우리가 잘 살면 안 된다는 외침 같았다. 단 몇 살이라도 어른인지라 그냥 배시시 웃었다.


더 가관인 건 그다음이었다. 그 부모가 바통을 넘겨받았다. 반려견을 키운다는 말에 대뜸 개를 키우던 연예인 아들이 죽었는데, 부검을 해보니 개 털이 내장에 가득 차 있었다며 나를 나무랐다. 증권가 지라시 만도 못한 헛소리를 해댔다. 우리 아이들을 처음 본 자리였다.


갑자기 봉인해 놨던 기억이 연쇄적으로 떠올라 부아가 치밀었다. 아빠 돌아가시고 대학원을 준비할 때 우리 집에 놀러 왔던 기억이 살아났다.


"내 친구들은 유학 다녀오고, S대 대학원도 나왔는데 취직 안 돼서 다 놀더라."


대학원 입시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내게 남긴 응원이었다. 지역 명문고에 입학하지 못했을 때는 "그 학교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 가기 힘들지 않나?"라는 말을 했고,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는 내게 "그 학교 취직 잘 안 되지 않나?"라는 말을 아주 천연덕스럽게 던지던 사람들. 모두가 똑같이 부아 가득한 검은 말들을 쏟아내는 능력자 들이었다. 이런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괜히 엄마에게 짜증을 내곤 했다. 다신 그 인간들 얘기 꺼내지 말라고.


<이미지 출처 : pixabay>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자기들과 우리의 처지를 비교하면서 그들의 행복을 채워가는 거 같았다. 우리가 부족했던 건 돈 외에는 없었다. 그런데도 순박한 우리 집 식구들은 늘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늘 관대했다. 그런 인간들을 진짜 인간 대접해주는 식구들 마음이 너무 좋은 거 같아 화가 나기도 했다. 국가 대표급 날카로운 성격의 누나조차 무심했다.


마음의 굳은살이 나이만큼의 두께로 
단단해진 덕에 한결 여유롭게
과거와 대면할 수 있다.


식구들 중 수십 년 전 불편한 기억을 여태껏 머금은 사람은 나 혼자뿐이다. 세월만큼 오래 품고 키우며 살았다. 그때 그 감정을 날것 그대로 간직하고 수시로 꺼내 분노하면서. 그들은 기억도 하지 못할 먼지 같은 일일지도 모르는데, 나만 수시로 마음의 동요에 시달리는 꼴이었다.

검은 기억, 부질없는 집착, 억울한 한탄의 도돌이표. 오랜만에 엄마랑 둘이 점심을 먹으면서 허심탄회하게 검은 기억 가득한 과거를 파헤쳤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잠잠히 받아들였다. 엄마는 대화 도중 놀란 듯 "그랬어? 그런 말을 했어?"라는 일일드라마 주연급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그만큼 그따위 말들은 하찮게 여겼다는 의미겠지. (부정하고 싶지만) 어쩌면 하나뿐인 동생을 보호하려는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언제나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원 남 부아 나는 말만 골라서 하는 사람들이 있어. 다 부러워서 그런겨."


엄마는 언제나 대범하고 덤덤하다.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젊었을 때는 엄마의 범함을 전수받누나와 달리 엄마 성격을 지 못한 여리여리한  참 싫었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 엄마를 보면서 점점 대범하면서 둔해질 수 있는 지혜가 생겼다. 엄마를 잠식하는 평심 넘치는 삶이 로 그 대범함에서 비롯된다는 결론에 다다라서다.


마음의 굳은살이 나이만큼의 두께로 단단해 덕에 한결 여유롭게 과거와 대면할 수 있게 됐. 괜한 집착과 부정으로 지저분하게 자리했던 그들의 악담을 오늘 부로 모두 날려 버렸다. 모진 세월 덕에 점점 더 대범해진 엄마 덕분이다. 다짐했다. 이제는 그런 분별없는 누군가의 말에 분별없이 흔들리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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