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시대의 발칙한 이직
'삶의 형태는 천편다변적이 되어가는 중'
15년 다닌 회사를 호기롭게 박차고 나왔다. 첫 이직이라 한 달 정도는 쉬고 싶었지만, 현실은 바람과 달랐다. 공식 퇴사일 다음날부터 새로운 회사에 출근했다. 늘 쏜살같은 세월은 벌써 첫 월급을 안겨주었다. 어느새 두 달째. 돌이켜 보면 코로나19 시대의 이직, 긴가민가한 애매한 도전이었다.
'직장인 60% 이직 후회'라는 기사가 있고, '이직 보류한 직장인 74% 후회'라는 기사도 있다. 직장인은 어느 장단에 맞춰 춤춰야 할까. 시도하지 않으면 후회할 일도 없다.
하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곳에서 직장생활을 마냥 이어가는 것도 현명한 방법은 아니다. 어디에도 정답이 없기에 스스로 맞다고 생각하는 답을 찍어야 한다.
진심 어린 이직 결정 후 마무리하기까지 약 3개월 정도 걸렸다. 기업과 개인 간 필요 요건이 맞아떨어지면 이직은 급물살을 탄다는 걸 첫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이직 준비 시기에는 정신이 없다. 없는 시간을 쪼개가며 세 번의 면접을 봤다. 합격하니 기분이 좋았다. 가치를 인정받은 기분, 존재에 대한 자부심이랄까. 그동안 잊고 지내던 자신감이라는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했다.
하지만 출근일을 받고 나니 다시 차분해졌다. 현실의 차가움을 느꼈다. '적응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이다. 새로운 곳, 마스크로 무장한 낯선 사람들, 쉽게 가까워질 기회가 줄어든 시대다.
15년 직장생활에서 누리던 인간관계의 편안함과 업무처리의 편리함을 그리워할 거라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외롭고도 어려운 사투에 대한 상상을 하고, 희미해졌던 또라이질량보존의 법칙이란 용어가 떠오르기도 했다.
걱정과 불안을 가득 머금은 첫 출근을 거쳐 실전에 돌입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났다. 섣부른 착각이라는 걸 깨닫는 중이다. 새로운 곳에서 재시작하면서 난데없는 시대감을 읽고 있다. 시대가 바뀌었음을 몸소 체감했다.
사람들은 코로나 팬데믹 같은 공황상태에 빠지면 6개월은 혼란을 겪고 2년이면 적응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상황을 받아들이고 공황은 일상으로 스며든다. 요즘처럼. 위드 코로나 전에도 사람들은 이미 마스크와 국가 통제에 적응하고 있었다.
회식하는 맛에 회사 간다는 기성세대의 쌉쌀한 막말은 사라진 지 오래다. 영국의 전 총리 마거릿 대처는 한 인터뷰에서 "사회란 없다. 그저 한 개인의 남녀와 가족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코로나 팬데믹이 관통하는 지금과 가장 어울리는 말 아닐까. 놀라운 사실은 이 인터뷰를 한 시기가 1987년이라는 것이다. 더 놀라운 건 최근 직장인들이 동료보다 가족과 지내는 시간이 더 늘어났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직장인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함께 부대끼고 성장하며 정체성을 찾았다. 이제는 각자도생의 시대를 지나 나노사회(한국 사회가 극도로 미세한 단위로 분화되고 있다는 의미)로 접어들었다.
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공동이 아닌 개인주의 문화로 변하고 있다. 개인의 정체성은 집단이 아닌 개인 취향을 당당하게 드러내며 바뀌고 있다. 회식이라는 억지스러운 단결과 소속감, 혈연, 학연, 지연 등의 연고주의는 조금씩 희미해졌다. 삶의 형태는 천편일률적이 아닌 천편다변적이 되어가는 중이다.
이러한 흐름 덕분에 큰 불편 없이 새 시대 속, 새 생활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다. 이직 후 저녁 회식 한번 못했지만 직장생활에는 아무 문제없다.
쓸데없이 어울리며 관계에 연연하던 때와는 다른 삶이 펼쳐지는 것이다. 해야 하는 일은 더욱 명확해지고 일과 삶의 분리도 점점 더 당연한 현상으로 자리 잡는 요즘이다.
부대끼며 더불어 살던 세상에서 모두가 제 위치에서 개인 역할에 충실한 밀도 있는 시대로 바뀌었다. 이 짧은 시간에 아직 모든 걸 속단할 수는 없겠지만, 불안과 의심 가득했던 이직 결정에 안심 한 표를 던져본다.(십 수년간 벌벌 떨었던 이직, 알고 보니 별거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