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에 부모님과 여자 친구 얘길 나눈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대화의 주제가 이성교제로 쉽게 흐르지는 않았죠.
중3 때 여자 친구가 제 절친을 좋아해 기분이 상한 제게 아버지께서"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라는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아버지랑 이성교제에 대해 나눈 처음이자 마지막 대화였습니다.아직도아버지 말씀이잊히지가 않아요.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건.
시대가 바뀌고 또 바뀌면서 자녀와 부모 관계도 점차 개방적으로 변했습니다. 고1 딸아이가 남자 친구 이야기를 솔솔 털어놓을 만큼이요.
딸아이는 중학교 1학년 때처음 남친이 생겼어요. 딸이첫 고백을 받았을 때,마침 저와 놀러 나와 떡볶이를 먹고 있었죠.그날이 고백데이였다고 하더라고요.
"아빠 나 고백받았어요!"
"사귀기로 했어?"
"아직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서... 요."
이때부터 딸아이의 남자친구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매번 길어봐야 한 두 달 교제했지만, 고1인 지금까지 총 여섯 명과 일곱 번의 이별을 경험했네요.
아내에게는 오히려 남친 얘기를 잘 안 합니다.다섯 번째 남친을 두고 아내가 "왜 하필 그런 애랑 사귀어!?"라는 말을 한 뒤부터 '엄마한테 절대 말 안 해!'라는 다짐을 했다네요.
아이들도 심사숙고해 누군가를 사귀기로 마음먹겠죠. 자녀와의 거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일단 자녀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는 걸 경험으로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헤어지자고 했는데, 계속 못 헤어지겠다고 그래요. 어떻게 해야 해요?"
딸아이가 중3 때 이별에 대해 어려움을 토로할 때도 있었습니다.시작만큼 이별도 중요하죠.불편하다고 피하지 말고 만나서 대화하면서 잘 마무리하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딸아이중3 때남친과는 저희 집에서 예고 없이 마주친 적 있습니다. 반차를 내고 일찍 퇴근했는데, 단 둘이 딸아이 방에 있더라고요.
딸아이는 보통 '남친이랑 집에서 놀게요'라고 사전 통보를 하는데, 제가 일찍 퇴근할 줄 몰랐던 거죠. 깜짝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는데 둘이 후다닥 나가버렸네요.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시간이 좀 지나니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딸아이가 학원에서 돌아와 제 방문을 빼꼼히 열었습니다.
"아빠한테 할 말 있어?"
"아니요."
"왜 없을까? 이리 와 봐."
딸아이와 마주 앉았습니다. 딸아이는 '잘못 한 건 없는 거 같은데 혼날까 봐 걱정이 됐다'라고 하더라고요. 잘못이라면 미리 부모님께 얘기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거였죠. 학원 가기 전 시간이 잠깐 비어 집에 들렀던 거라고.
딸아이와는 평소 이런저런 수다를 자주 떠는 편이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이번에 굳이 잘못한 걸 따지자면 약속을 안 지킨 거 하나지만, 딸을 걱정하는 아빠의 마음을 차근차근 얘기했죠. 혼낸 것도 아닌데 털털한 딸아이 눈에 눈물이 그렁. 짠해서 서둘러 대화를 마쳤습니다.
아빠의 바람은 한 가지입니다. 학창 시절 건전한 이성 관계를 유지했으면 하는 마음이죠. 딸아이를 믿지만, 워낙 사건사고도 많고 미디어가 꾸민 그럴싸한 연애 이야기도 많다 보니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그래서남자들의 늑대 같은 앙큼함에 대해 수시로 알려주기도 하죠.
저도 초등학교 5학년을 시작으로 꾸준히 여친을 사귀었던 터라 이성교제에 대해서는 관대합니다. 여사친도 많고요. 이성교제도 경험입니다. 누군가를 만나고 좋아하고 헤어지고 배우고 깨달으면서 성장하고 조금씩 성숙해지는 거죠.
딸아이 방에서 시커먼 남학생을 봤을 때 순간적으로 화가 났는데 잘 참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작정 화부터 내고 따지고 들었다면 말이 통했을까요. 부모의 화법이 일방적이면 아무도 원치 않는 뾰족한 말만 쏟아낼 가능성이 큽니다. 차분함을유지하면 (물론 완전 어렵죠) 아이들도 조금은 차분하게 반응합니다. 부모의 차분을 자녀가 비딱하게 응수하면 시간을 잠시 두고 다시 대화하면 됩니다.
사건의 주인공은 딸과 두 번 이별하였습니다. 중3 때는 딸아이가 헤어지자고 했고,재결합한 고등학생 때는 딸아이가 차였습니다. 그렇게 딸내미 좋다고 '절대 마음이 변할 일 없을 거야'라며 매달리더니 '마음이 예전 같지 않아'라는 말로 이별을 고했다고. 마음이 쓰렸지만, 남몰래 속앓이 하지 않고 이별 이야기까지 담담하게 전하는 딸을 보니 마음은 좀 놓였습니다.
남친에게 차인 다음 날이 딸아이의 고등학교 첫 중간고사 날이었습니다. 시험 전날 밤에 방청소를 아주 열심히 하더라고요. 영문도 모른 체 열심히 도와주었지요. 속으로는 '시험인데 공부는 왜 안 하지?!'라고 생각하면서요. 이때는 남친과 헤어진 줄 몰랐습니다.
차인 다음날 두 과목을 시험 봤고 결과는 반전이었습니다. (딸 자랑 주의!)
"아빠 나 차이고 완전 각성했나 봐요. 시험 보는데 집중이 엄청 잘 되는 거예요."
"전 남친 덕 봤네?"
"남친이고 뭐고 다 부질없어요. 이젠 다신 연애 안 하려고요. 공부나 해야지."
오! 듣던 중 아주 반가운 말이었습니다. (사실 헤어질 때마다 하는 말이긴 합니다) 이별의 아픔은 두 과목 모두 100점(이럴 애가 아닌데)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시험을 망치고 남친 탓을 해도 모자랄 판에 어려운 상황에서 필살기를 발휘했다니 딸을 차준 남친이 고맙기까지.
딸의 연애 이야기를 들으면 풋풋하고 재미있어서 푹 빠져듭니다. 딸아이 남친의 마음으로 돌아가 이런저런 제 경험담도 나누고요. 덕분에 딸과는 대화도 많이 하고 더 가까워졌습니다. 아빠에게 아직도 많은 걸 털어놓는 딸이 너무 고맙고, 실연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이 대견합니다.
그래서 주말에 쇼핑 가서 위로 옷도사주고, 값비싼 카드 지갑과 에어팟(두 번째임)을 잃어버렸는데도 잔소리를 꾸욱 참았답니다. ('자기가 더 속상하겠지'라는 역지사지의 마음을 발휘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