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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들 제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라산 영실코스 탐방기(2019.02.26)

by 도시락 한방현숙
'한라산'을 오르리라

복잡하고 분주한 2월의 학교 일정에서 알토란 같은 며칠을 찾아내었다. 벌써 5년의 시간이 흘러 학교를 옮겨야 하는 때에, 이 학교도 저 학교도 걸치지 않은 황금 같은 시간을 꽉 부여잡아 행여 놓칠세라 '한라산'을 포개 넣었다.

제주도는 1993년 신혼여행지로 처음 발을 디딘 이래 거의 20여 년 동안 잊고 지내다 최근에 자주 찾게 되었다.

누군들 제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찾으면 찾을수록 또 가고 싶어 지고, 그러다 아예 눌러앉고 싶어 지는 섬, 제주가 되는 것은 나만의 희망은 아닐 것이다.

특가 항공권이 보이자마자 바로 예약을 해 버렸다. 등산에 자신 없는 엄마와 등산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 딸이 꿈도 야무지게 겨울 한라산 등반을 목표로 비행기에 오른 것이다.

뭔가 심기일전하고 싶었다. 새 학교 전근이라는 부담감과 잦은 실수와 기억력 저하로 부쩍 사라진 자신감을 마치 한라산 꼭대기에서는 털어버리거나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을 ‘기필코’라는 단어와 함께 부여잡고 제주 품에 안겨 버렸다.

내가 그린 2월의 한라산 모습은 이랬다. 물론 첫 등반에 ‘백록담’까지 보겠다는 욕심은 아예 접었기에 ‘영실’ 코스를 선택했지만

그곳에는 당연히 눈이 있었고 눈보라 치는 설경 속에 굳건하게 서 있는 내가 있었다. 아이젠을 신고 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모든 부담감을 털어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멋진 내가 있었다.
내가 그린 2월의 영실코스의 설경-다음 이미지

그러나 2월 한라산 영실코스 ‘윗세오름’으로 오르는 길에는 풀도, 꽃도……. 나의 배경으로 바라고 바라던 눈도 없었다. 삭막한 들판에 바스러질 듯 황량한 풍경만이 펼쳐져 가방에 있는 아이젠이 무색할 따름이었다. 한라산 지킴이 분들의 말을 빌자면 이렇게 눈(雪)이 하나도 없는 것은 최근 몇 년 동안 올 해가 처음이라고 한다. 그 특별한 해에 나는 생전 처음 한라산을 밟은 것이다. 그것도 ‘설산’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그러나 ‘눈 덮인’ 한라산은 어디에도 없었다.

깡마른 2월의 영실코스
'윗세족은 오름' 전망대에서 바라본 백록담 분화구
드론이 날고 있다.
'한라산'은 처음이라...

제주도 여행물품을 대여해 주는 곳을 이용하여 아이젠과 등산용 스틱, 가방을 빌렸다. 이 대여소가 제주공항 근처에 있기에 우리는 머물러 있던 ‘협재’에서 바로 한라산을 가지 못 하고 제주시를 거슬러 올라야 했다. 부담스럽기만 한 한라산 등반을 미루고 미루다 결국 여행 마지막 날에 올랐기 때문이다. 등산 일을 확정하고 제주공항 근처에서 대여물을 바로 찾았다면 훨씬 순조로웠을 텐데…….

머뭇거리는 둘째 딸을 달래다시피 하며 한라산을 향해 차를 몰았다. 일찍 도착해야 좀 더 입구에서 가까운 주차장에 차를 댈 수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거의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모든 것이 어설픈 상황에서 어리바리한 모습으로 차에서 내리다 때마침 불어오는 강풍에 몸까지 흔들리자 더럭 겁이 났다. ‘등산을 시작하면 화장실이 없다’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곳곳에서 보면서 올라왔기에 마음은 더 졸아들었다. (이곳이 영실 탐방 안내소 주차장이었나 보다.) 그런데 차도를 따라 더 올라갈 수 있다는 반가운 안내원의 말을 듣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물론 마지막 화장실도 있었다. 아까 영실 탐방 안내소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면 40 여 분을 더 걸어서 올라가야 휴게소 입구에 닿았을 것이다.

이곳은 영실휴게소, 2.5Km 아래 영실탐방안내소가 있다.
차가 밀릴 때는 2.5Km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1280m 영실 휴게소

우리가 차로 최종 도착한 곳은 ‘영실 휴게소’였다. 등산에 필요한 모든 것들은 다 있을 것 같아 보이는 ‘오백장군과 까마귀’라는 휴게소에서 주먹밥을 산 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다. 신발 끈을 야무지게 다시 묶고, 등산 스틱을 펼치며 입산제한 시간 12시를 겨우 턱걸이로 통과하여 등반을 시작하였다.

우리의 출발 지점은 해발 1280m 되는 곳이었다. 하늘이 맑고 높은 만큼 계단 또한 높았다. 처음 30분 동안은 헉헉거리며 죽을 것 같았다.

죽음의 '병풍바위' 코스

‘병풍바위’가 나타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한참을 오르고 올라도 우리 앞에 ‘병풍바위’는 그대로 있었다. ‘영실기암과 오백나한’이 있다는 곳에서는 숨을 몰아쉬며 그 형상들을 일일이 찾으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저 아래 멀리 보이는 오름들과 바다와 나뭇가지들이 그저 삭막하게 다가올 뿐 가쁜 숨을 진정시키지는 못 했다. 그래도 이때까지도 저 너머에는 설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멀리 병풍바위가 보인다. 숨이 턱까지 찼다.

30 분쯤을 더 헉헉거리고 오르니 정상인가 싶은 곳이 눈에 들어왔다. 점 같이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분명 사람의 실루엣이 틀림없는 모양들이 모여들어 절경을 감상하는 듯했다. 막바지 힘을 내어 그곳을 향했지만 쉽게 다가오지 않을뿐더러 최종 목적지 또한 아니었다. 오르고 올라도 계속 이어지는 계단으로 힘듦이 절정에 달았다. 곳곳에 옷을 벗은 나무들이 깡마른 몸매로 눈길을 끌었으나 역시 눈(雪)이 없어 아쉬웠다. 우리가 밑에서 보았던 그곳은 ‘윗세족은 오름’의 전망대였다.

쉽게 병풍바위가 뒤로 가지 않는다. 오르고 또 올라도...
정말 힘든 코스-그래서 깔딱고개인가?
등산 난이도 '힘듦'의 빨간색으로 표시된 병풍코스!
살만한 '윗세족은 오름' 코스

전망대는 내려올 때 오르기로 하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힘든 고비를 넘겼기에 맞이할 수 있는 평탄한 땅이 숲을 지나니 나타났다.

동네 산책길 닮은 나무 테크로 이어진 길은 양쪽에 빨간 깃발을 내세운 채 끝도 모르게 이어져 있었고 그 끄트머리에 백록담을 담은 남벽이 넓은 등을 드러내며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곧 웅크리고 있던 등을 펴고 활개를 칠듯했다.

성산 일출봉이 생각나는 자태였다. 다음에는 꼭 백록담을 보리라 마음을 먹으면서도 ‘그 길은 또 얼마나 더 힘들까’라는 생각에 마음을 멈칫하기도 하며 길을 따라 걸었다.

숲이 나타나 또 한참 걸었다. 바닥이 눈이다.
꿈같은 '선작지왓' 코스

1700m 고지에 이런 평원이 펼쳐지다니…….

이 평원을 ‘선작지왓’이라고 부른다는데 ‘돌이 서 있는 밭’이란 뜻의 제주도 방언이라고 한다.

이 주변의 ‘붉은오름, 누운 오름, 족은 오름’ 등의 크고 작은 오름들을 합쳐 ‘윗세오름’으로 부른다고 한다.

‘선작지왓’이
온통 눈으로 덮여 눈부신 때를,
철쭉으로 덮여 황홀할 때를,
초원으로 덮여 시원할 때를 그리며 1Km를 걸으니 드디어 우리의 최종 목적지 ‘윗세오름’이 나타났다.
온통 흰눈으로 덮이면 빨간 깃발만이 길을 안내할 것이다.
내가 본 '선작지왓'
내가 그린 '선작지왓'! 눈이나 풀, 또는 꽃이 있다.-다음 이미지
드디어 도착!'윗세 오름'

‘윗세오름’ 대피소 근처 따뜻한 양지를 골라 앉아 숨을 고르며 간식을 먹으려는데, 벌써부터 하산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마음이 분주해졌다. 까만 눈빛이 초롱초롱한 까마귀들만이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날아들어 우리의 간식을 탐하고 있었다. 영실 휴게소에서 산 주먹밥이 꿀맛이었다. 마지막 관광객마저 빠져 한가로워질 때까지 사진을 찍으며 ‘윗세오름’을 눈에 담았다. 이제야 등에 흐르던 땀이 시원해지고, 임무를 수행했다는 뿌듯함이 우리의 마음을 가볍게 하였다. 당당하게 1700m 고지를 담은 ‘윗세오름’ 팻말에서 사진을 찍었다. 사람들이 종종 이곳에서 ‘드론’을 날리는지 ‘드론 비행’에 관한 플래카드가 보였다.

'윗세오름' 대피소
까마귀, 까마귀! 이날은 사람보다 더 많았다.
햇빛이 따스하게 내리고 있는 '윗세오름'
대피소 매점은 폐쇄되었다. 여기서 먹는 컵라면이 아주 별미라는데...

따스한 햇빛과 부드러운 봄바람에 좀 더 안기고 싶었지만 우리가 거의 마지막 등산객이라 계속 나오는 하산 방송을 흘려들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 ‘어리목코스’로 내려가거나 ‘남벽분기점’으로 올라가거나 해서 자리를 뜰 수 있는데, 당연 우리는 오던 길 ‘영실코스’를 택해 내려왔다. 눈길은 자꾸 ‘남벽분기점’을 향해 방향을 잡으나 시간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무리였기에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내려가는 여러가지 길
내려올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곳을 새로이 보면서 내려왔다. ‘윗세족은 오름’ 전망대에서 망원경을 통해 본 남벽 경사면의 절벽은 압도적이었다. 360도를 돌아 서귀포, 산방산 등등 제주도 ‘오름’들과 바다들을 쭉 훑고 시선을 당기니 노루가 한 마리 있었다. 막혔던 숨이 탁 트이며 귀여운 노루의 동작을 쫒고 있자니 어디선가 ‘드론’이 나타나 뱅뱅 거리며 날고 있었다. 광활한 이곳은 ‘드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인가 보다.

부담이 사라진 하산길
바위 옆에 노루가 보여요!
멋있다.

병풍바위까지 오르는 구간에서는 다시 또 오리라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는데, 전망대 아래 펼쳐진 ‘선작지왓’의 모습이 재방문을 부추기고 있었다. ‘선작지왓’의 또 다른 풍경을 보고자 하는 욕심이 생긴 것이다. 맑고 푸른 하늘과 예스런 회색빛의 구상나무가 기막히게 어우러져 있는 길을 내려가며 ‘병풍바위’와 ‘영실기암과 오백나한’의 모습을 다시 보니 아까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후의 날씨와 어우러져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렇게 한라산을 순찰하며 청소까지 하시는 분들이 있었다.
백록담, 다시 뵐게요.

누군가는 왕복 3시간이면 다녀온다는 길을 우리는 장장 5시간에 걸쳐 한라산 품에 안겨 있었다. 난 한라산 다녀온 여자가 되었다. 그렇게 인생에 또 다른 도장을 찍었다.

아쉬움은 늘 새로운 도전을 만든다.

눈으로 덮인 ‘선작지왓’이, 푸른 물로 가득한 백록담이 다음에는 꼭 보자고 눈짓을 보낸다.

기꺼이 품어 약속을 지키리라 확답하고 한라산 영실코스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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