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품안의 자식

나의 개 아들 '잡채'

by 도시락 한방현숙
영원한 품안의 자식은……. 없다.

자식이 자라서 부모의 품을 떠나 정신적 육체적으로 독립하는 것은 건강한 성장이고,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한 모습이나 다 큰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쓸쓸한 마음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더 나아가 실망감과 자괴감마저 들 경우가 생긴다면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부모는 탄식한다.

“ 자식도 품안의 자식이지……. ”

품안의 자식을 키울 때, 부모는 곧 아이의 우주가 된다. 부모의 몸짓, 손짓 하나에 아이는 천국을 오가며, 부모의 목소리 색깔 따라 아이는 울고 웃는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의 세상을 좀 더 밝게, 좀 더 가볍게, 좀 더 환하게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부모는 곧 아이의 전 세상이기에…….

나도 그 시절 힘들었지만 힘든 줄 모르고 힘을 낸 것은 아이의 웃음이 또한 나의 우주였기에 가능했으리라.

유리처럼 투명한 눈망울, 말랑말랑한 부드러운 살결, 포동한 손을 잡고 있노라면 하루의 피로가 사라질 정도로 달콤했었고, 나만을 바라보고 나만을 따르는 아이를 위해 나 또한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매일매일 새롭게 단단해지던 때였다.

내가 만든 우주가 아이가 가진 우주 전부일 때 품 안의 자식일 테지만 생각보다 길지 않은 시간이다. 아마 초등학교 4학년쯤부터일까? 아이는 나만의 우주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나름의 다양한 우주를 만들어 가며 성장하고 변화한다. 아이가 나만의 우주 안에 머물러만 있다면 정말 큰일 날 일이지만 내가 가늠하거나 짐작도 못하는 세상을 디딘 아이를 볼 때면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아이가 만든 세상 안에 내가 전혀 없음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기특한 마음으로 그 세상을 다듬어주는 것 또한 부모의 몫이리라.

정말 눈 한 번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아이들은 어느새 성인이 되어 있었다. 막내까지 내년이면 스무 살이 되니 나의 그 달콤한 시절 소환은 추억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리라. 물론 다 자란 자식을 바라보는 보람과 기쁨 또한 상당하고, 평범하게 성장한 자식들이 특별히 애를 태우는 것도 아닌데 가끔 그 시절이 생각나고 그리운 건 중년의 여유로움 때문일 수도 있다.

영원한 품안의 자식은……. 있다.

나는 너의 우주다. 너는 나의 기쁨이다.

너의 초롱한 눈동자 안에는 전부 내가 담겨있다. 너의 시선 가는 곳마다 내가 있고,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너는 집중한다. 너의 눈망울에 나는 정화되고 너의 애정에 나는 감동한다.

내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오는 너의 믿음에 울컥하고, 매일, 순간마다 반기고 아껴주는 너의 사랑에 힘을 얻는다.

나는 너를 보면 그냥 웃는다. 너는 나를 보면 마냥 반긴다.

아마
내일도,
내년에도,
그 후에도 쭉 그럴 것이다.
그래서 넌 나의 영원한 품안의 자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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