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30동 가까이 되는 대단지 아파트에 산 지 10여 년이 넘었지만 발걸음은 언제나 우리 사는 동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다. 아파트를 드나드는 경로가 아니고는 굳이 구석구석 다닐 이유가 없었는데, ‘잡채’와의 산책이 일상이 되면서부터는 온 곳을 누비고 다닌다.
봄에는 온갖 꽃 잔치를 즐겼다. 목련을 시작으로 벚꽃이 길을 열어 지나갈 때마다 황홀감을 안기더니 곧이어 왕 벚꽃이 만개하고, 매화, 살구꽃, 진달래, 철쭉, 개나리까지……. 꽃 대궐이 따로 없었다.
장미꽃이 지천인 요즘에는 나무 아래로 열매들이 떨어져 이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그새 깜박 잊은 ‘식물 바보’인 나에게 새로운 인사를 건네고 있다. 마트에서나 본 적 있는 알이 굵은 매실이 왕창 떨어져 있더니, 어제는 살구가 지천으로 깔려 안타깝게도 여기저기 뭉개져 있었다.
이 아파트가 재개발되기 전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아름드리나무들은 오늘도 거대한 녹음을 만들며 시원한 바람들을 불러 모으느라 열일 중이고, 그 나무 아래 나와 ‘잡채’ 같은 인간과 반려동물들은 나무가 주는 기쁨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 그리고 곧 배롱나무에서 백일홍이 피어오르고, 모과와 감나무도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죽은 소나무 등걸을 타고 능소화가 얌전히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잡채’와 이미 한 시간 가량의 산책로 코스를 개발하여 다닌 지 꽤 오래지만 영락없이 그 길만을 따라가는 ‘잡채’의 발길은 언제나 신통하기만 하다. 계단으로 오르다 비탈길로 내려와 다시 언덕을 오르는 구불구불 코스를 잘도 기억해 내어 달리고, 오솔길을 용케 알아내어 꼭 거기서는 큰길을 마다하고 샛길로 빠지는 ‘잡채’의 영특함이 기쁘기만 하다.
'잡채'! 정말 신기하지? 이웃(고양이)이 넘 건방지다고 해야할까? 아님 여유롭다 해야할까?
꽃밭을 지나, 작은 정원을 지나, 놀이터를 지나, 아파트 뒤 작은 동산까지 지나오면 헐떡거리는 ‘잡채’와 달리 내 몸은 긴장이 풀리며 느슨해진다. 어느덧 복잡했던 머릿속 얹힌(체한) 일들도 저녁식사 소화되듯 말랑해지고 가벼워지니 이 길이 갈수록 좋아지는 이유일 것이다.
'잡채'야~~ 너도 유치원 가고 싶니?
' 언제쯤이면 내가 산책을 시작할까?' 만을 초집중하여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는 ‘잡채’의 저녁시간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어서 주인이 돌아오기를, 어서 설거지를 끝내기를, 어서 욕실에서 나와 산책길 차림으로 불러주기만을……. 그 간절한 눈빛을 이겨낼 수 없는 날에는 야심한 밤에도 우리는 길을 나선다.
겅중겅중 어둠 속으로 뛰어나가는 ‘잡채’ 주위로 낮과는 다른 검은 풍경들이 펼쳐진다. 놀이터는 한낮의 열기를 식히느라 아무 말 없이 조용하고, 새파란 풀잎들도 어둠에 싸여 휴식을 취하는 듯 한껏 아래로 아래로 퍼져 있다. 벤치 위에도, 돌길 사이에도, 사람들이 떠난 자리마다 물건들이 이제야 주인이 되어 차분히 휴식을 취하고 있다.
'잡채' 여전히 쫄보! 축구공도 무서워요.
그 사이에 신나게 움직이는 것은 ‘잡채’ 뿐이다. 제 마음대로, 제 멋대로 여기저기 킁킁거리며 가벼운 발걸음을 놀린다. 나는 ‘잡채’가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기면서도 어둠 속에서 불빛으로 드러내는 집집마다의 풍경을 소리로, 냄새로 슬쩍슬쩍 점쳐 본다. 아이들 울음소리, 왁자한 웃음소리, 얼큰한 또는 고소한 음식 냄새, 나타났다 사라지는 집안사람들의 실루엣까지 잠깐잠깐 이웃의 살림살이를 흘깃거려 본다.
‘아, 나와 같구나! 우리 집과 비슷하구나!’
원인 모를 안도감이 내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아파트 동마다 나와 있는 분리수거장의 낡은 가구를 볼 때면 우습지만 나의 편안함은 극에 달한다. 집안을 예쁘게 꾸미지 못한다는 것이, 늘 정리정돈이 필요한 살림살이라는 것이 내가 가진 단점이기에…….
낡고 터지고 무너진 가구들, 흐릿하게 빛바랜 얼룩 투성이 살림살이들, 바로 전까지 집안에 있었을 그 낡은 가구들이 나에게 ‘괜찮아. 괜찮지?’ 안심하도록 말을 건네다니…….
우리 집안의 낡은 가구가 나만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 다 그렇고 그런 살림살이로 오늘을 살아내고 있다는 동질감, 나만 어지럽거나 나만 낡은 것이 아니라는 확대 의미 해석만으로도 한껏 발걸음이 가벼워진다.때아닌 위안은 언제나 반갑다.
‘잡채’는 익숙한 것들의 모퉁이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며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나는 그런 ‘잡채’에게 세상에 없을 온화한 미소를 날리며 다가가고 있다. 마침 여름을 맞아 무성하게 무더기진 호랑가시나무 옆이다. 곧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알싸한 향기 뿜어내며 꽃을 피울 것이다.
걸을수록 기분 좋은 아름다운 산책길이다. 더할 나위 없는 ‘힐링’의 재충전 길이기에…….
'잡채' 친구는 이미 멀리 갔어. 너도 엄마랑 같이 가던 길 가야지~ 그러고 꼼짝 안 하면 어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