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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니빈 Jan 26. 2024

세상에 괜찮은 악플은 없다 - 프롤로그

지구 최초 '악플 대응 가이드라인' 프로젝트

메일함에 기레기를 검색했다.


이미 ‘안 읽은 메일’이 만 개 넘게 쌓인 ‘받은편지함’. ‘기레기’를 검색했다. 최근 들어 욕이 섞인 메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결과가 주르륵 나왔다. “그러고도 기자 자격이 있느냐”는, 비교적 점잖은 질책부터 차마 옮기기 어려운 욕설로 점철된 메일까지. 2년 전부터 국회를 출입하고 있기 때문에 최근 메일은 정치 이야기가 섞인 것들이 특히 많았다. 대부분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을 비판하는 논조의 기사를 읽고 보낸 것 같았다. 그럴 줄 알았지만, 그래도 하나하나 마음에 콕콕 박히는 기분이었다.



  여러 출입처를 거치며 이곳저곳에 이메일 주소를 등록했다. 그래서 하루에도 수십 통씩 보도자료와 알림이 쏟아진다. 덕분에 이들 틈에 가끔 섞여 들어오는, 욕이 난무하는 이메일들에는 상대적으로 시선이 덜 가고, 정말 몰라서 못 읽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인지하지 못했을 뿐,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를 쓰는 기자 개인에게 욕설이 담긴 이메일을 보내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간 여러 온, 오프라인 공격에 대응해 온 방법은 그저 회피하는 것뿐이었다. 왠지 욕이 섞였을 것 같은 메일은 그냥 열어보지 않았다. 이런 경우도 있다. 숨 가쁘게 취재 현장을 오가다 보면 택시를 탈 때가 많다. 운전자들 중 일부는 취재원과 통화하는 내용을 어렴풋이 엿듣고, 목적지가 방송국이라는 점을 확인한다. 그리고는 묻는다. “기자세요?” 그러면 “아니요. 그 건물에 있는 다른 회사예요.”라고 둘러댄다. "JTBC는 대체 왜 그래요?" 등 별로 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 뒤따르는 경우가 많고, 대뜸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이는 경우도 있어 겁이 나기 때문이다. 많은 우리 기자들은 의외로 디지털 괴롭힘에 무덤덤하다. 너무 자주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일부 기자들의 프로필과 사진까지 수집해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기도 한다. 사실 근거 없는 비난인 경우가 많다. 보통 기자들은 자신의 이름과 얼굴이 악의적으로 공개되어 있는 온라인 사이트를 보면서도 “열심히 일했다는 훈장”이라며 웃어넘기곤 한다.


  한국기자협회와 한국여성기자협회가 공동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기자라는 이유로, 특히 특정 기사로 공격당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77.9%가 “그렇다”라고 답했다. 이나연 연세대학교 교수는 이와 같은 온라인 괴롭힘이 일정한 특성을 보인다고 했다. ^기자가 여성이거나 소수자인 경우, ^방송기자인 경우에 더 정도가 심했고, ^독재 국가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더 자주 발생한다. 젠더 및 페미니즘 이슈, 정치 등 사회 갈등을 유발하는 분야의 기사를 쓰면 더 많이 공격당했다. 특히 여성 기자는 공격의 빈도와 정도가 더 심한 만큼,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마초적인 기자 문화 특성상 고통을 호소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괴로움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나약함’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기자가 뉴스 이용자와의 상호작용을 회피하게 되고, 스스로 자기 검열에 빠지게 하며, 기자직에 대한 회의감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직접 겪었거나 주변 동료들에게서 들었던 디지털 괴롭힘의 사례가 많이 떠올랐다. 반복적으로 욕설이 담긴 메일을 받는 경우는 허다하고, 개인 핸드폰 번호와 소셜미디어 계정까지 동원해 악의적인 연락을 해 오는 경우도 있다. 방송기자들의 경우 뉴스 리포트를 통해 얼굴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으므로 더욱 공격에 취약하다. 이와 같은 공격은 디지털 기기의 발전으로 더욱 빠르게 퍼져나가는 추세다. 젊은 층 위주로 공유해 왔던 기존 온라인상의 소통과 문화가 세대를 막론하고 쉽게 유행의 흐름을 타게 됐다. 스마트폰을 타고, SNS를 타고 뉴스가 퍼져나가는 만큼, 기자에 대한 각종 악의적인 공격도 같이 퍼져나가게 됐다.


  해외 언론 환경은 어떨까? 스리랑카 언론인 출신으로, 기자들에 대한 디지털 괴롭힘에 대해 오래 연구해 온 아만다 페라라. 아만다는 호주에 있는 미디어 분야 전문가 그룹인 다트(DART) 센터(https://dartcenter.org/)의 아시아-태평양 지부 소속이다. 그는 “호주에서도 언론인들이 많은 공격을 받는다”라고 했다. 특히 정치 성향이 다른 시청자들로부터 악성 메일을 받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지난 2023년 호주 멜버른에 있는 ABC 방송국에 었다. 사무실을 둘러보는데, 벽에 붙은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구성원 중 한 명의 이름과 함께 “우리는 인종차별에 반대합니다" 라고 쓰여 있었다. 소수 인종 관련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온라인에서 공격받고 있었던 동료를 돕는 거였다. 사실 멜버른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도시다. 전 세계 인구를 압축해 놓았다고 해도 될 정도로 거리에 여러 인종의 시민들이 있었고, 이들은 저마다 다른 뉘앙스의 영어로 자유롭게 소통한다. '맛집'을 검색하면 호주 현지 음식점보다는 한식집과 마라탕집이 먼저 나올 정도다. 그런데도 소수 인종 관련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언론인이 공격받는다는 사실이 새삼 안타깝게 느껴졌다.


  호주의 이른바 ‘국민 앵커’도 악플을 피할 수는 없었다. ABC 방송국의 메인 뉴스 격인 아침 뉴스를 수년째 진행하는 리사 밀러는 30년 넘게 저널리스트로 일했다. 호주에선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다. 유명하다는 건 그만큼 괴롭힘의 타깃이 되기도 쉽다는 뜻. 리사 밀러는 기자로 일할 때는 물론, 앵커인 지금도 여전히 정신과 의사와 주기적으로 만나 상담을 받는다고 했다.


  다트 센터 아시아-태평양 지부는 최근 언론인, 그중에서도 여성과 성소수자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괴롭힘(Technology-Facilitated Gender-Based Violence, 요약하면 'TFGBV')에 대응하기 위한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작하기 위한 워킹 그룹을 꾸렸다. 다트 센터 소속 전문가들과 센터에서 주관한 연수를 수료한 아시아-태평양 지역 기자들이 함께 참여한다. 매달 정기 교육 및 토론을 거쳐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온라인 괴롭힘에의 대응 및 지원 전략을 마련한다는 취지다. 이 프로젝트는 구글 뉴스 이니셔티브(GNI)의 지원을 통해 진행되었다.


  나는 2023년 여름, 호주에서 열린 다트 센터 주관 <재난취재보도와 트라우마과정> 연수에 참여했다. 이후 위 프로젝트가 진행될 예정이라는 안내를 받았고, 여성 및 성소수자 기자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제작하는 건 정말 뜻깊은 작업이라고 생각해 대한민국 기자 자격으로 함께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TF는 2024년 2월부터 7월까지, 6개월 간 매달 온라인 교육 및 토의 세션을 진행했다. 스리랑카, 솔로몬제도, 대만, 방글라데시, 인도 등 다양한 국적의 현직 기자들이 참여했다. 이들과 나는 다른 기자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참고할 수 있는 일종의 '팁 시트(Tip sheet)'를 만들어 각국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까지 맡았다. TF에서 다뤄진 내용들 중 공유할 수 있는 부분들을 기록했다.


  세상에 괜찮은 악플은 없다. 모쪼록 이런 논의가 더 많은 언론인들이 온라인 괴롭힘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궁극적으로 이 기록이 기자로서 본연의 목적과 기능을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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