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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mish May 31. 2020

우리는 많은 똥강아지들을 키웠다

이층 집에서 일곱 걸음

우리는 많은 똥강아지들을 키웠다.


별로 기억이 나지 않던 삽살개 복슬이, 진돗개 진돌이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곁에 없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는 삼둥이 요크셔테리어까지. 애완견인 요크셔테리어를 키우기 전까지는 흔히 시골 똥개라 불리는 개들을 '시골개답게' 키웠다.

내가 개들에게 애정을 주기 시작한 것은 직접 이름을 지어주고 나서부터다.


시작은 하얗고 어린 진돗개에게 ‘소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자유롭게 풀어놓고 키우던 개였는데, 어느 날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이유도 기억나지 않았다. 당시 나에게 시골 개란 그저 집을 지키고 사람들이 남긴 음식 찌꺼기를 먹는 동물에 지나지 않았다. 오다가다 귀여워해주는 것이 다였을 뿐, 그 이상의 애정을 주진 않았다. 그래도 견상이 기억에 남던 아이였고,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안쓰러운 맘이 있었다.


아주 어린 새끼일 때 분양받은 ‘또리’의 경우는 좀 특별했다. 어느 날 갑자기 집 밖에 묶이게 된 성견이 아니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자 바구니에 왠 솜뭉텅이가 들어있었다. 아빠가 싱글벙글 웃으며 그걸 보라고 하였다.


솜뭉텅이를 보라고? 나는 자세히 들여다 봤다. 새근새근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태어난지 얼마 안된 아주 작은 강아지였다. 발바리라고, 흔히 시골 잡종이라 불리는 개였다. 진돗개보다 다리가 짧고, 딱히 자신의 브랜드가 있는 종은 아니었다. 흔히 말하는 똥개. 하지만 그 솜뭉치를 본 순간부터 그 아이의 귀여움에 빠져버린 나는, 열렬히 애정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우리는 동거동락할 수 있었다.  

같이 자고, 같이 놀고, 맛있는 간식도 많이 주었다. 한동안 또리는 잔뜩 사랑받았다.

또리가 성견이 되고 난 후는 집밖으로 보내졌다. 아무래도 애완견이 아니었기 때문에 집 안에서 기르는 건 한계가 있었다. 있었다..곤 했지만, 사실 그게 중요한 문제였을까 싶었다.


자신의 안락한 보금자리와 그간 독차지했던 애정을 모두 잃은 또리는, 집으로 들어오려고 여러번 시도했지만 번번히 혼나며 내쫓아졌다. 괜찮아. 내쫓는게 아니야. 새 집을 주는거야. 라며 2층짜리 근사한 강아지집도 지어주었지만 객관적으로 추방당한게 맞았던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애정도 식기 시작했거든.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집 밖으로 내쳐진 그 아이의 상황이 영락없이 집을 지켜야 하는 다른 시골 개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전에 함께 했던 맥락도 지워버린 채 그 아이는 다시 정의되었다.

이따금씩 또리가 당시에 느꼈을 기분에 동화되곤 한다. 얼마나 마음이 아렸을까.

똥개는 밖에서 키워야 한다고, 개는 개일 뿐이라고 우리는 명명을 했던 것이다. 그걸 또리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자신의 이층 집에 묶여 살던 또리는 그 모습이 답답할 것 같다는 나의 걱정과, 풀어놓아도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또리는 시골 마을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놀다 들어오곤 했다.

그 모습에 안심이 되면서, 그 아이를 신경쓰는 나의 마음 또한 점점 줄어갔다.


애정을 구하러 돌아다니던 또리는 마을의 어느 진돗개와 싸우다 큰 상처를 입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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