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즉택목(鳥則擇木) 목기능택조(木豈能擇鳥)"란 말이 있다. 소설가 최명희의 <<혼불>>에 나오는 말이다. 새는 나무를 골라서 살지만, 나무는 자기에게로 와서 사는 새를 선택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누구에게는 선택의 권리가 있고 누구에게는 그 선택할 기회조차 없어 그저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함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식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지만 언젠가 그 품을 떠날 수 있다. 또한 부모는 자신의 분신으로써 생명을 낳고 키워내는 사명을 지닌다. 요즘 여러 가지 이유로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긴 하지만 자연의 섭리로 볼 때 어버이가 자식을 키우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높은 나무 위, 부지런히 잔가지들을 물어와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아 기르는 어미 새의 정성이 떠오르는 말이기도 하고 먼 나라에서 조국을 그리는 교민, 사랑하는 이를 한없이 기다리는 이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인연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까. 불교에서는 눈 깜빡할 사이를 ‘찰나’라고 하고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시간을 ‘탄지’라고 한단다. 숨 한 번 쉬는 시간은 ‘순식간’이라고 표현하는 데 비해 ‘겁’이란 헤아릴 수조차 없이 길고 긴 시간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어느 블로그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이 있어 옮겨본다. 힌두교에서는 43억 2천만 년을 ‘한 겁’이라고 하여 500겁의 인연이 있어야 옷깃을 스치고 2000겁의 세월이 지나면 하루 동안 동행할 기회가 생기며 무려 5000겁의 인연이 되어야 이웃이 된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가 일상에서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사람들은 이러한 엄청난 시간들이 쌓여 탄생된 소중한 존재들이다. 더구나 살과 피를 나눈 혈육뿐만 아니라 이웃으로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에게로 오는 새를 선택할 수 없는 나무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사회에서 만나는 수많은 관계들을 피하고 싶어도 받아들이고 관계를 이어가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난 존재인지도.
친구 중에 말이 많아 통화를 하면 꽤 긴 시간 수화기를 붙잡고 있는 이가 있다. 처음 한두 번은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주고 대답을 하고 수긍을 해주었다. 그게 오래 알고 힘들 때 서로 도와준 벗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잦아지다 보니 조금씩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상대의 기분을 생각해서 빨리 끊자는 말도 못 하고 속으로만 끙끙거리다 오늘 기어이 직언을 하고 말았다. 수업을 끝내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전화기에 친구의 이름이 떴다. ‘아, 또 오래 걸리겠구나.’ 말을 하다 보니 이런저런 말들이 이어지고 전화를 받은 지 한 시간이 다 되어갔다. 뒷정리도 해야 하고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은데, 점점 기운은 없어지고 결국 한 마디가 입에서 불쑥 튀어나갔다.
“넌 너무 말이 많아.”
친구도 곧장 인정하긴 했지만 그렇게 털어놓은 내 마음도 편안하지 않아서 곧바로 미안하다는 문자를 보냈다. 주변에서 그런 말을 자주 듣는다는 친구의 대답에 허탈한 웃음이. 그럼 이제는 내 심정도 알려나 싶으면서도 너무 야박하게 말한 것 같아 미안함이 가시질 않는다. 서로를 어느 정도 알아서 다투거나 큰 문제로 이어지진 않았다. 친구에게는 내가 어마어마한 겁을 지나 만난, 속을 풀 수 있는 이웃일 텐데 날아드는 새가 조금 마음에 안 든다고 바로 쏘아버렸으니 좋은 나무는 못 되는 셈이다. 아직도 마음 수양이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이겠지. 그래도 속에 담아둔 말을 하고 나니 조금 후련하기도 하다.
한 번 씨앗이 떨어진 자리에서 뿌리가 썩어도 다리를 옮길 수 없는 나무와 날개 가진 새의 안타까운 인연이 우리네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날아오는 새가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리를 옮길 수 없으니 한 번 씨앗이 떨어진 그곳이 곧 나의 자리임을 알고 어느 새든 정답게 대화할 수 있는 넉넉한 품을 키워나가야겠다. 친구와의 통화가 다시 한번 나의 부족한 성정을 일깨워주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