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사람이 아름다워요!
책장을 펼치니 '인자선난이후학,가위인의(仁者先難而後學),可謂仁矣)'가 적혀 있다. 논어를 사랑하는 어느 작가님의 친필 사인이 적힌 신간이 도착한 것이다. 이 문장은 '인자는 궂은 일을 우선시하고 대가는 헐값으로 여기니 인(仁)답다.'라는 뜻이다. 사람들 속에 살면서 그들과 관계를 맺는게 필수적인데 때로 피곤함을 느낀다고 했더니 저런 답변을 주셨다. 과연 논어를 사랑하는 이답게.
궂은 일을 우선시하고 대가는 헐값으로 여기는 게 ‘인자’라면, 나는 궂은 일은 하기 싫고 대가는 크게 바라니 ‘소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 글 쓰는 동아리 '글친'의 총무로서 해이해질 때마다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는 문장 한 수를 만나니 반갑고 고마워 이 책을 보내준 작가님뿐만 아니라 주변의 인연들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진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에너지를 많이 써야하는 일이다. 민감한 유형의 성격을 지닌 나는 무엇을 보거나 들을 때, 다른 이들-덜 민감한 유형-보다 더 많은 자극을 받고 반응을 한다. 그래서 보거나 들은, 받은 자극을 비우고 정리하는데도 에너지가 많이 쓰이는 편이다. 언젠가부터 지인들의 이야기가 즐겁지 않고 온 몸으로 집중해서 듣고 나면 몹시 피로해져서 몸이 아프기까지 했다. 상대의 눈빛과 표정, 감정과 속내까지 짐작하고 유추하느라 과도한 힘이 들어간 게 아닐까. 좀 단순하게 살면 좋겠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아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살아내다보면 혼자서 끙끙거릴 때가 많다.
"그 사람은 말을 왜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라고 한 마디를 건네자 어머니께서 이렇게 응수하신다.
"너무 미워하지 마라."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으로 받아들이는데는 시간이 걸리고 걸린 시간만큼 몸도 힘들고 지친다. 그런데 오늘 저 문장을 만나니 역시 문제는 속 좁고 모자란 나의 성정. 아닌 척 했지만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우위에 서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가 보다. 글친 모임이 있는 날, 음료수를 사서 챙겨들고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뛰어나가는 일. 회원들이 이메일로 보내준 원고를 도서관에 들려 프린트하는 일. 단톡방에 공지를 올리고 누가 오는지 오지 않는지 신경을 쓰는 일. 그 모든 수고를 봉사가 아닌 의무로 느끼고 알게모르게 대가를 바란 것은 아니었을까.
하루 하루 살아가면서,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의 부족함은 더 크게 보이고 그럴수록 부끄러움도 많아진다. 남들은 모르지만 그릇이, 크기가 이것밖에 안 된다는 것이. 어른다운 어른이 된다는 게 얼마나 힘든 길인지 알수록 뒤로 물러나고 싶은 유혹도 더 커지는 것이리라.
"제 롤모델은 축구선수 박지성입니다. 궂은 일을 도맡다 보면 틈이 생기고, 그 틈에 집중하면 활로가 열리더라구요."라는 글 쓰는 벗의 조언이 고맙고 다정하다. 집에서는 딸로, 학원에서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사회적으로 만나는 공동체에서는 회원으로 하나가 아닌 여러 역할을 맡아서 사는 일. 셰익스피어가 말한 대로 '인생은 연극' 그 자체이다. 그 속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 부딪치고 감탄하는 것. 때로 그들의 삶 속 이야기에 같이 빠져 함께 울고 웃는 것. 그게 사람사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인생이란 점의 연속이며, 찰나의 연속이다." <<미움받을 용기>>에 나오는 문장이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인생은 춤이나 여행처럼 그 과정 속에서 기쁨을 느끼고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만나고 관계를 맺는 이들은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고 영향을 주고 받는 과정의 향유자들인지도. 때로 사람으로 피곤해서 병까지 날 지경이지만 그들로 인해 가슴이 뛰고 고마워 눈물이 나려는 때도 많다. 사람이 가시인 동시에 빛나는 왕관인 셈이다.
어느 새 서로 편안해지고 친숙해져서 삶의 자잘한 일상들을 나누고 고민을 털어놓으며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또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상대를 이해하고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 그 순간이 내게는 눈부신 찰나이자 계속 살고 싶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사람으로 인해 쉽게 상처받는 우리, 그래서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사회. '인'은 커녕 내 앞가림하기도 버거운 세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고 견디며 한 발 내딛어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조금 전보다 성장하고 새로워진다. 당신의 말에 귀담아 들어주는 이웃이 있다면 고마워하라. 누군가가 당신의 귀를 필요로 한다면 그것 또한 감사하고 가끔씩 시간을 내어주자. 그러면서 우리는 함께 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정상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 않더라도 나지막한 어느 길가, 누군가와 같이 웃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대는 이미 성공한 인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