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일상 생활 속에서 겪게되는 스트레스들 중, 권위에 의한 스트레스가 가장 싫다. 직장 상사가 자신은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쉽게 던지는 무례한 말들에 스트레스와 상처를 받는 이유는, 그 말 자체라기보다는 그와 내가 갖는 '상-하 관계'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심한 말이든 그렇지 않은 말이든 어떤 말을 듣게 되면, 권위 때문에 아무말도 하지 못하는 그 상황이(혹여 한다 해도 약자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스트레스를 준다.
혼자 일할 수 없는 이상 직장 동료, 상급자, 하급자와는 어떻게든 좋은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고 생각하는데, 가끔은 정말 어떻게 행동하는 게 옳은지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지곤 한다. 내가 가만히 참고 적당히 웃으며 넘기는 게 옳은지, 그래도 한 마디쯤은 불편한 말을 던져주는게 옳은지.
22.
※ 덕후 주의
미술품 수집에 관한 책을 보는데 뱅크시의 작품이 나왔다. 자연스레 의식의 흐름이 이어져, 뱅크시가 디자인을 한 영국 밴드 블러의 <Think tank> 앨범을 떠올렸다. 그리고 생각난 김에 책을 읽으며 그 앨범을 들었다.
(*블러는 뱅크시, 데미언 허스트, 줄리언 오피 등 영국 현대미술 작가와 디자인, 뮤직비디오 작업을 한 것으로 유명. 기타리스트인 그레이엄 콕슨이 미술 전공자.)
블러는 음악 자체도 마냥 대중적이라기보다는 실험적이기도 했고, 늘 변화하기 위해 노력했던 면이 있었다. 그런 매락에서 블러가 현대미술 작가들과 함께 작업했던 것이 쉽게 납득이 된다. 보컬 데이먼 알반의 가장 성공적인 프로젝트도 장르적으로 그가 그동안 해오던 음악과는 전혀 다른 '힙합'에 가까운 고릴라즈였으니.
반면 블러가 가장 인기있었던 시절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오아시스의 경우는, 음악이 조금 더 대중적이고 투박하다. 블러가 음악적으로 꾸준한 변화를 추구했던 반면, 오아시스는 해체 이후 노앨 갤러거의 솔로앨범까지 큰 변화도 없었고. 뮤직비디오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블러는 그것을 음악 작품의 연장으로 생각했다면, 오아시스는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필요악의 프로모션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이런 점 때문에 블러보다 오아시스가 더 큰 인기를 끌 수 있었다. 둘 다 음악성이야 뛰어나지만, 대중들은 조금 더 보편적이고 우리들에게 가까운 것들을 노래하는 오아시스에 끌릴 수밖에 없었고.
그리고 이는 두 밴드의 출신과도 관계가 깊다는 생각이 든다. 오아시스는 뼛속부터 하층 노동자 집안 출신이라면, 블러는 중상류층 출신이었다. 오늘 벌어 내일 먹고 살 걱정을 하는 오아시스에게 현대미술이라는 것은 먹고 살만한 사람들의 쓸데없는 여흥으로밖에 안 느껴졌을 테니. 반대로 '늘 먹고 살만했던' 블러의 경우는 그런 여가활동 또한 중요한 삶의 가치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 점 때문에 블러의 음악 세계에는 음악 그 이상의 것이 중요하게 작용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시골(충남 당진)에서 나고 자란 우리 조카들과 서울 출신 아기들을 비교해보면 우리 조카들이 가진 (너무 귀엽긴 하지만) 시골 특유의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나 또한 어떻게든 서울에 비비고 들어와 6년째 살고 있지만 태생적인 촌티를 벗을 수 없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블러의 앨범을 들으며 미술품 수집에 관한 책을 읽는 고상한 취미를 가졌다고 해도 말이다.)
나 또한 블러보다 오아시스를 훨씬 더 좋아한다는 것이 내 태생을 숨길 수 없는 어떤 부분이 아닌가 싶다.
23.
골목길 사이에 덕지덕지 간판이 붙은 한국 풍경이 보기 싫다는 사람도 많지만, 개인적으로는 무척 좋아하는 한국(서울?)의 모습 중 하나이다. 다소 조악해보이지만, 그 조악함이야말로 어쩌면 한국의 진정한 모습을 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오히려 너무 감각적으로 멋을 부린 간판들을 보고 있으면 더 큰 거부감이 든다. (부담스럽다고 할까) 특히 비오는 날 바닥에 고인 물에 비친 간판들의 네온은 사이버펑크 풍이라 더 멋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24.
1월은 한 해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지난 해의 마무리이기도 하다. 연말정산과 사업장 현황신고를 하면서 새삼 깨닫고 있다.
연말정산은 회사에서 준 매뉴얼대로 처리하니 금방 할 수 있었다. 작년에는 특히 월세도 살지 않았고, 이사도 가지 않았고, 회사도 옮기지 않아서 별도로 준비할 서류가 없어 금세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독립출판을 하면서 낸 사업자덕분에 해야 하는 '출판사 사업장 현황신고'는 조금 어려웠다. 매출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하다보니 이런 자잘한 것까지도 처리해야 하는 게 너무 어렵다. 그나마 인터넷에 잘 정리해주신 좋은 분들 덕분에 겨우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연말 정산 제도 자체가 조삼모사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더 내면 손해보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모쪼록 뱉어내는 일이 없길...
25.
압구정에 있는 팀버랜드 오프라인 매장에서 샘플 세일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샘플로 만든 제품들을 아주 염가에 판매하는 세일) 평소 대비 반의 반값으로 물건을 팔고 있다는 소식에 회사가 끝나자마자 달려갔다.
세일 시간이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라고 해서 닫을까봐 급히 갔는데,(현금만 된다고 해서 ATM에 들러서 잽싸게 돈도 뽑아감) 도착해보니 다행히 6시 반이었다. 하지만 행사는 끝나지는 않았는데, 물건은 거의 빠지고 없어서 허무했다. 신발은 꽤 있었지만 신발을 살 생각은 없었고, 자켓같은 것을 구매하고 싶었는데, 옷 종류에는 남은 물건이 별로 없었다. 힘들게 왔는데 그냥 가기에는 아쉬워서 여자친구것과 내것 총 2장 반팔 티셔츠를 사서 나왔다.
반팔 티셔츠를 뚤레뚤레 들고 집에 왔는데, 집에 와서 입어보니 어째 너무 충동구매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 몇 년동안의 경험으로 '단순히 싸서 산 옷들은 제대로 입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올해부터는 마냥 싸다고 사지 말고 오래 입을 옷은 잘 고민해서 돈을 더 주더라도 사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런데 얼마 되지도 않아서 이렇게 구입하고 말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켓 종류의 옷 재고가 없던 게 더 다행인 일인가 싶기도 했다. 적당히 마음에 드는 자켓을 샀다면 입지도 않고 애물단지가 되었을 테니 말이다. 과연 내가 현명한 구매를 하게 되는 날이 올까...
26.
오랜만에 모임(?) 같은 걸 다녀왔다. 피자로 저녁을 간단히 먹고 나서 맥주집으로 이동해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종로에 위치한 청계천이 보이는 아주 자리가 좋은 맥주집이었는데, 토요일 저녁이었음에도 사람이 거의 없었다. 요즘 광화문쪽의 상권이 괜찮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주말 저녁에 이렇게 휑한 것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암튼 평소에 술을 잘 안먹기 때문에 오랜만에 간 사적인 술자리였는데, 맥주 한 잔을 마셨을뿐인데도 시간이 금세 지나있어서 깜짝 놀랐다.
(모임에 대한 감흥은 별다를 게 없어서 생략.)
27.
일요일 저녁은 보통 책을 읽으면서 조용히 마무리하는 게 좋다. 일요일 밤까지 게임을 하거나 자극적인 일을 하면 어쩐지 잠도 잘 안오고 기분도 심란해지는 것 같다. 8시~9시쯤엔 누워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게 가장 평온하고 행복하다.
오늘도 책을 읽으며, 요즘 부쩍 생각나던 Phum Viphurit의 달콤한 노래를 들으며 남은 일요일을 마무리했다. 별 것 아니지만 큰 행복을 느꼈는데, 내 삶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부분이 새삼 얼마나 큰가를 느낄 수 있는 무척 소중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