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 아니까
저는 엑셀 없이는 무엇도 시작하지 않는
철저한 계획형 인간 J형,
그냥 J가 아니라 JJJ형 인간입니다.
계획이 없는 삶은 있을 수도 없고
일을 할 때도 쉴 때도 심지어 백수 시절에도
그날의 계획이 없으면 무척 불안해하는 성향을 지녔었어요.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사회생활을 점점 더 하다 보니
계획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고.
(세상의 모든 일이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우쳤어요.)
오히려 마음이 가는 대로
느낌이 오는 대로
나의 '감'에 따라 움직였을 때
오히려 더 즐겁고
결과도 더 좋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이 '감(感)'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고,
일반적으로 우리가 체험하는 '감(感)'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숱한 경험 속에서 축적된 데이터, '감(感)'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계획을 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이번 달 예산은 어떻게 맞출지,
몇 년 뒤에는 어떤 직업과 위치에 서 있을지를 상상하며 수없이 많은 계획을 그리곤 하지요.
아주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든 대충 윤곽정도만으로 계획을 세우든,
계획을 세우는 이유는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고 예측 가능한 미래를 그려줌으로써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을 덜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철저한 계획보다 순간의 감을 믿고 행동했을 때
더 나은 결과를 맞이하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것을 단순한 '운'이나 '우연'으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저의 '감(感)'은 허공에서 뚝 떨어진 직감이 아니라,
그동안 겪었던 숱한 경험 속에서 축적된 데이터이자 저만의 통계라고 생각하거든요.
흔히 말하는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이라는 말은 회사나 조직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고,
개인의 삶에서도 적용됩니다.
우리가 살아오며 실패하고 배우고,
기뻐하고 실망하며 쌓아온 경험들이 곧 데이터이며,
그 데이터가 무의식 속에서 '감(感)'이라는 형태로 표출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새로운 일을 맡을 때,
처음부터 완벽한 계획을 짜려하면 머리가 복잡해지고 실행이 더뎌지기 일쑤입니다.
반대로 “이 방향이 맞을 것 같다"라는 감(感)을 따라 한 걸음 내디디면 예상치 못한 길이 열리기도 합니다. (확률적으로만 봤을 때요.)
사실 그 순간의 판단은 무모한 것이 아니라,
과거 수많은 유사한 상황 속에서 스스로 체득한 작은 단서들이 쌓여 나온 결과물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왠지 이 방향이 더 나을 것 같다'는 느낌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데이터 분석 결과의 압축된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정말로 체감하여 예시로 자주 드는 생활 밀착형 에피소드로,
체온계 없이 여행을 갔다가 아이의 컨디션이 나빠졌는데 열을 잴 방도가 없어 순간 당황했었지만,
차분히 손바닥으로 아이의 이마를 만져보고 볼을 만져보고 등을 만져보면서 열이 몇 도인 지를 짐작하여
해열제를 먹여야 하는지 판단을 했던 적이 있어요.
체온계 없이도 손바닥으로 아이 이마를 대는 순간 해열제를 먹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건
지난 10년 동안 제 손바닥과 피부와 머리에 쌓인 데이터 덕분이었습니다.
(남편은 가지지 못한 저만의 개인 데이터인 셈이지요.)
계획은 지도, 감(感)은 나침반
물론 계획의 가치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좀 더 완벽하게 계획을 세우고 혹시 모를 비상상황을 대비하여 체온계를 가져왔더라면
아주 쉽고 빠르고 정확하게 아이의 상태를 파악해서 처치를 할 수 있었을 거예요.
때문에 계획은 지도를 펼치듯 큰 그림을 보여주고,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줄여줍니다.
하지만 계획만으로는 절대 예측할 수 없는 영역이 있기도 합니다.
시장의 변화, 사람의 마음, 우연히 발생하는 사건들 같은 변수들 앞에서 계획은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감(感)이 나침반 역할을 해줄 수 있습니다.
계획이 지도라면, 감(感)은 현장에서 직접 마주하는 나침반과 같아요.
지도만 보고 길을 가려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결국은 현장에서의 판단이 필요하게 되는데
바로 그 판단을 이끌어주는 것이 '감(感)'입니다.
돌이켜보면 인생의 중요한 순간일수록 저의 '감(感)'을 따랐을 때 후회가 적었던 것 같습니다.
직장을 선택할 때, 새로운 프로젝트에 도전할 때, 혹은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조차
“왠지 이게 맞을 것 같다"라는 직감을 따른 적이 많았어요.
처음에는 불안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 결정이 의외로 합리적이었음을 깨닫곤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건,
'감(感)'은 결코 비이성적이거나 무책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감(感)'을 무시하고 계획만을 좇았을 때 더 많은 후회를 남겼던 것 같기도 합니다.
감(感)을 믿는다는 건 내 삶의 경험을 존중한다는 뜻
'감(感)'은 결국 나의 과거가 쌓여 만들어진 ‘개인화된 데이터베이스’입니다.
누구도 나와 같은 데이터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나만의 '감(感)'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독특한 분석 도구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감(感)'을 믿는다는 건,
곧 내 삶의 경험을 존중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가 겪은 수많은 실패와 성공, 작은 일상의 선택들이 오늘의 '감(感)'을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의 삶에서 여전히 계획을 세워야 하는 일들은 계속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어디까지나 참고서에 불과할 것이고
최종적인 선택의 순간이 오면, 내 안의 데이터, 즉 '감(感)'을 더 신뢰할 것 같아요.
'감(感)'을 믿고 나아가는 것은 무모함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내가 나에게 건네는 가장 현실적인 조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계획과 '감(感)'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노력합니다.
계획은 나를 준비시키고, '감(感)'은 나를 움직이게 합니다.
미래는 아무도 모르죠.
그러나 나만의 '감(感)'은,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나의 데이터이고, 나의 방향이 될 테니까요.
그리고 이 '감(感)'이, 느낌이 과학이라는 것을
아주 논리 정연하게 설명하는 박문호 교수의 설명을 듣고 나면
나의 감이 얼마나 객관적인지 셀프 납득도 가능해집니다.
영상링크: 느낌적 느낌에 관한 박문호적 뇌과학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