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60대 아빠, 30대 아들의 페로제도 여행 21밤 13

8/20 흐리고 비

by 페로 제도 연구소

일어나 보니 집에 아무도 없다. 잠시 침대에 누워 뒤척이고 있으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아빠가 들어왔다. 어딜 다녀오셨냐고 물어보니 또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왔다고 한다. 한 바퀴 둘러봤는데, 이 마을은 산업단지 같은 곳이라고 했다. 맞다. 내 기억이 맞다면 여기는 페로의 해산물 수출 대기업이 모여있는 곳이고, 여기서 가공한 상품이 세계 각국으로 수출된다고 한다.


IMG_8783.gif
IMG_8800.jpeg
IMG_8803.jpeg

대충 씻고 나와 작년에 아내와 갔던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이 마을의 유일한 식당이다. 양고기랑 해산물 플래터를 시키고 이것저것 얘기하다 보니 음식이 나왔다. 양고기는 썰은 게 한 6조각 정도 나왔는데, 생각보다 양고기가 너무 적어 좀 당황했다. 작년에도 이랬었나?. 가격은 DKK 220로 약 4만 4천 원 정도. 감자는 두 종류가 나오는데, 하얗고 작은 그릇에 담긴 감자가 진짜 맛있다. 약간 달달하고, 더 단단/쫄깃한 식감이 느껴진다. 반대로 통감자는 입에 들어갔을 때 부스러지는 그런 느낌이고. 고기 양이 조금 적은 걸 제외하면 굉장히 밸런스가 잘 잡힌 음식이다. 먹다 살짝 물리나? 싶을 때쯤 절인 양배추를 먹으면 입맛이 리셋되는 마법의 음식.


IMG_8805.jpeg

해산물 플래터는 DKK 265로 약 5만 2천 원인데 좀 실망스러웠다. 왜냐면 새우가 너무 작았기 때문에... (레몬 밑에 깔려있다.) 칵테일 새우보다 작은 것 같은데? 해산물이 주력인 나라지만 저 크기의 새우는 너무한 거 아니냐고~~~! 대구와 연어는 맛있었다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뭐, 아빠만 맛있게 드시면 됐지.


27659B5F-53F4-4741-B651-FA50B70F453D_1_105_c.jpeg

밖을 보니 날이 갤 기미가 안 보인다. 그래도 비가 안 오니까 오늘은 이 동네 뒤편 트레킹 코스에 가볼 예정이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할 때 우리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길래, 한국에서 왔고 작년에 아내와 여기 왔었다고 얘기했다. 그랬더니 우리가 기억난다는 듯한 뉘앙스로 얘기를 했다. 아마 여기 오는 동양인이 몇 안 돼서, 진짜 기억했을지도 몰라.


IMG_8793.jpeg

이 마을의 거의 유일한 카페이자 볼거리인 방문자 센터로 향했다. (선물 가게가 하나 있긴 한데, 체인이다. 어딜 가든 비슷한 상품을 판다.)


IMG_8812.jpeg
IMG_8814.jpeg

일단 밥을 먹었으면 커피를 마셔야지. 인포센터 내 위치한 카페에 들어갔다. (같은 건물이다.) 아빠는 단 커피를 좋아하는데 이 중 뭐가 단 커피인 지 모르겠어 '마키아토겠지?' 하면서 직원에게 '이거 단 커피야?'라고 물어봤는데, 직원 대답이... '글세요, 전 커피 안 마셔서 모름 ㅎㅎ'이었다. 들으면서 이게 맞나...? 싶었는데 이게 페로인의 삶이겠지;? 한국이었으면 씨알도 안 먹힐 소리인데 여기서 들으니까 '이게 삶의 여유인가...?'라는 생각도 들고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이 같이 들어 기분이 묘하다. (마키아토는 별로 달지 않았다.)


IMG_8827.jpeg

내가 여기 오면서 가장 기대한 게 하나 있는데, 바로 2층의 양말 코너다. 작년에 여기 왔을 때, 아내는 2층에 올라가 거의 30분 동안 양말 코너에서 서성이다 결국 맨손으로 나왔다. 양말 하나에 2만 원 정도 했던 것 같은데, 한국 와서도 그게 눈앞에 아른거린다고 했다.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지. 벌써부터 싱글벙글할 아내 얼굴 생각에 기부니 죠타. 그런데 1년 사이에 상품 배치를 바꾼 건지 양말 코너가 없어져서 정말 슬펐다. 원래 저 창가 아래쪽 선반에 양말 바구니가 있어야 했는데... 아쉬움을 머금고 내려왔는데 1층 다른 구역에 양말이 몇 개 남아있어 거기서 양말을 대충 구경했다.


IMG_0360.jpeg

1층으로 내려가 서성이다 마침 인포 직원을 마주쳐 예전부터 궁금했던 '페로에는 왜 이렇게 어린애들이 알바를 많이 하냐'라고 물어봤다. 페로의 마트나 카페에 가면 어림잡아 15살 정도 되는 아이들이 정말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집에 가면 할 게 없기도 하고, 일을 빨리 배우고 싶어 하기도 한다'라고 했다. 집에 가면 할 게 없다니, 놀라운 일이다. 특히 여자애들에게서 그런 경향이 더 짙다고 하길래 이 얘기를 친구한테 알려줬더니 '본인도 지금까지 별생각 없었는데 어느 서비스직이든 여자가 더 많은 것 같다'라고 하길래 그 이유에 대해 잠시 토론을 했다.


IMG_8839.jpeg

밥도 먹고 커피도 마셨고 비도 안 오니까 오랜만에 좀 걸어볼까? 오랜만의 트래킹이다. 페로의 트래킹 코스 특징이라고 하면 마을과 마을을 잇는 코스가 있다는 것이다. 이번 트래킹도 마을 뒤편 길을 따라가다 보면 반대편의 엘두비크(Elduvík) 마을로 연결되는 길이기도 하다. 트래킹 코스까지는 이 작은 안내 표지에 의존해야 한다.


IMG_9045.jpeg

올라가는 길에 축구장이 있다. 이런 뷰에서 축구를 하면 어떤 기분일까? 축구를 하다가도 풍경에 눈을 뺏겨 공을 놓치는 일이 생기진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축구장을 본 아빠가 '나는 군대 있을 때 별명이 작은 펠레였다.'라고 했다. 내가 남자들의 군대 얘기가 그러려니라는 표정을 짓자 아빠는 적극적으로 그것이 허풍이 아님을 어필했다. 아저씨의 군대 얘기가 나올까 봐 황급히 주제를 돌렸다. 참고로 나는 군대에서 한 번도 축구공을 만져본 적이 없다.


IMG_8858.jpeg
IMG_8862.jpeg
IMG_8865.jpeg

올라가는 길에 군데군데 똥이 있었지만, 양이 많지 않고 초반에는 생각보다 올라가기 수월했다. 나는 트래킹의 필수 조건이 '걷다가 뒤를 봤을 때 펼쳐지는 새로운 풍경'이라고 생각하는데, 여긴 정말 그 조건에 딱 부합하는 곳이야.


IMG_8871.gif

근데 절반쯤 지나자 경사가 가팔라져 올라가기 조금 힘들었고, 올라가는 내내 바람이 한 점 불지 않아 땀이 엄청나게 흘렀다. 페로에서 트래킹을 할 때 항상 춥고 바람이 많이 불어 땀이 날 일이 거의 없는데, 아무래도 앞에 큰 언덕이 있어 바람이 잘 불지 않는 지형인 것 같다.


땀이 너무 많이 나 아직 정상에 도착하기도 전에 내려가서 씻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는데, 하필 그 시점에 흰 옷과 검은 옷을 나눠 빨아야 하는지에 대한 강박이 떠올라 머릿속에서 엄청 고민했다. 이런 것 좀 고쳐보려고 회사도 그만두고, 여행도 온 건데. 애써 지금을 즐겨보자라고 스스로를 세뇌하며 계속 코스를 따라 산을 올랐다.

IMG_8879.jpeg
IMG_8883.jpeg

한 시간 반 정도 걸렸나, 정상까지 올라갔는데 아내가 보고 싶어서 영상통화를 걸었다. 주변 풍경을 보여주며 아빠도 인사시켜 주려고 아빠 쪽을 비췄는데, 아빠가 돌을 쌓고 있는 모습이 포착돼 둘 다 피식 웃음이 났다.


IMG_8890.jpeg
IMG_8903.gif

그래~ 이 풍경이지. 한참을 넋 놓고 주위를 바라본다.


IMG_8920.jpeg

반대편 마을로 넘어가는 사다리다. 반대편 마을은 어떻게 생겼나 보려고 했는데...


IMG_8914.gif
IMG_8942.jpeg
IMG_8943.jpeg

그놈이 몰려온다! 안개가 내려오기 시작했고 이내 시야가 금세 희뿌연 안개로 뒤덮였다.


IMG_8950.gif

안개가 좀 야속하기도 했지만, 또 나름 운치가 있어 이번 안개도 조금 사랑하기로 했다. 안갯속에 있으면 정말 몽환적인 느낌이 들거든.


IMG_8987.jpeg

하산을 시작하려는데 아빠가 저 멀리서 외국인 여행자에게 '안개가 있으면 위험하다고 내려가야 한다'라고 얘기하길래, 내가 '다른 사람 여행에 간섭하면 안 돼~'라고 했더니 아빠가 '알겠습니다요~!' 하면서 '알았으니까 대충 그만해라 ㅎㅎ' 뉘앙스로 얘기했다. 간섭을 하고 싶다기보다는, 현지인도 아닌데 그 사람의 여행을 방해할까 봐 그렇게 얘기한 건데 너무 아빠한테 뭐라고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IMG_9011.jpeg

아빠는 저 멀리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IMG_9059.jpeg

내려오자마자 비가 오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아빠랑 맥주나 한 잔 하려고 했는데, 페로의 마트에서는 술을 팔지 않는다. 다행히도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숙소에 캔맥주를 비치해 놨는데, 캔당 kr. 20이었다(약 4천 원). 그런데 우리가 가진 돈은 kr. 50짜리 지폐라 30을 거슬러 받을 수가 없어서 그냥 토르스하운으로 돌아가 먹기로 했다. 저녁 먹을 곳이 딱히 없어 혼자 마트에 가서 장을 보려고 했는데 아빠가 이곳의 마트는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대서 같이 갔다. 마트가 다 똑같이 생겼지 뭐… ㅎㅎ


81316FE9-CC66-45B5-927C-4ABF80065E1D_1_105_c.jpeg
BC0858D8-75F1-4637-9757-AA56BAF63CFE_1_201_a.heic

마트에 갔는데 너무 선명한 지방층과 오돌뼈 부위가 있는 생오겹살이 있어 잽싸게 집었다. 딱 봐도 진짜 맛있는 부위였어. 그리고 초콜릿과자도 한 봉지 샀는데, 내가 어제 두 개 과자의 맛 차이를 리뷰하려고 사놓은 과자를 아빠가 말도 없이 혼자 다 먹어버렸기 때문이다. 일기를 쓰는 지금도 분노에 찬 키보드 소리가 방을 메우고 있지만, 이건 아빠와 좋은 시간을 보내려고 온 여행임을 상기하며 일기를 쓰고 있다.


B191A66C-EE1F-4CD1-903D-C8A35800BB15_1_201_a.heic

밥을 먹으며 뭐라도 얘기해야 할 것 같아 '아빠는 살면서 억울한 일이 뭐였냐'라고 물어봤다. 아빠는 삼겹살을 우물우물 씹으며 잠시 생각하더니, 크게 억울한 게 없었다고 한다. 굳이 따지자면 예전에 일하던 사장이 뒤통수 친 건데, 그때 같이 일하던 사람들은 다 10년 전에 은퇴했다고 한다. 문득 내가 재취업을 한다면 남은 수명이 얼마나 될지, 그 이후에는 뭘 할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저녁을 먹고 오랜만에 대학교에서 친하게 지냈지만 오랜동안 연락하지 않던 형한테 연락이 왔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형은 '너 이 직무 가고 싶다고 한 것 같은데, 그 포지션 채용이 열려서 연락했어~'라는 얘기를 꺼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퇴사를 하고 나니 막상 의지할 곳이 없어 막막한가?라는 생각이 들던 차에, 서로 연락도 하지 않던 사이인데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나에게 도움을 주려고 연락해 주다니.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일이다. 감사한 마음을 담아 형에게 답장을 한 후, 한국에 가면 어떻게 지원해 볼지 생각하며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감동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 가면 꼭 식사라도 사면서 감사하다고 말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형, 감사합니다.


그렇게 페로의 열세 번째 밤이 진다.




페로 제도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면?

https://brunch.co.kr/@airspace2010/14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