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7 비
그간 날씨가 며칠 좋았다 싶더니 다시 비가 주룩주룩 온다. 바람도 미친 듯이 불고 비가 하루 종일 예정되어 있어 숙소에서 쉬기로 했다. 아점으로 뭘 먹을까 하다 가사달루르 마을의 유일한 식당인 Gásadalsgarður에 가기로 했다.
차를 주차한 뒤 내렸는데 '지금 영업 중인가?'라는 생각이 드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페로의 식당들이 으레 그렇듯 마을에 위치한 식당들은 밖에서만 보면 감이 잘 안 오는 경우가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모던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의 깔끔한 식당이 나왔다. 우리가 첫 손님인 것 같다. 주인은 원하는 곳 아무 데나 앉으래서 가운데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는데, 다시 오더니 '예약이 있는 걸 까먹었다'라며 미안하지만 자리를 옮겨달라고 했다.
날씨가 좋을 때는 밖의 테라스에서 먹는 식사가 일품일 것 같다.
메뉴판을 보니 주력이 조리보다는 빵과 햄, 해산물 중심인 것 같아 다양한 메뉴를 고루 먹을 수 있는 것을 시켰다.
175 kr.로 3만 5천 원 정도의 식사. 하 역시 비싸긴 해...
190 kr.로 3.8만 원짜리 Fish 플래터. 피시 앤 칩스와 새우, 감자가 나온다.
그런데 먹다 보니 연어 위에 뿌려져 있는 소스가 너무 맛있는 게 아닌가! 머스터드소스 베이스 같긴 한데 좀 더 싱그러운 향이 났다. 그런데 그게 튀김과 생연어에 너무너무 잘 어울려 주방에 가서 소스 이름이 뭔지 물었다.
소스 이름은 '딜'이라고 한다. 시판 소스였어요...?
후식으로 시킨 만 원짜리 당근 케이크. 원래 당근 케이크 안 먹는데 호기심에 시켜봤다가 위에 얹은 소스 때문에 또 한 번 기겁할 뻔했다. 깊으면서도 산뜻하며 우아한 맛이 났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이런 소스를 먹어본 적이 없어 다시 주방으로 가 이건 무슨 소스냐 물어봤더니 크림치즈 소스에 뭔가를 더 섞은 거라고 한다. 뭘 섞었는지 말을 안 해주는 걸 보니 아마 비법소스 같은 건가?
소스의 정체를 알았으니 마트에 가서 한국에 가져갈 소스를 몇 개 구매하기로 했다. 가사달루르에는 마트가 없기 때문에 공항이 있는 소르바구르 쪽으로 이동해야 한다. 아까보다 안개가 훨씬 심하게 껴서 운전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마트에서 딜소스를 구매해 계산대로 갔는데 비자 카드(아마 외국 카드 결제 시스템 같은 거)를 쓸 수 없다고 한다. 대신 덴마크에서 발행한 카드로는 결제가 된다고 하는데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지. 페로 올 때 입장료 목적으로 현금을 좀 환전해 둔 것이 있었는데, 마침 그건 내일 이후로는 쓸 곳이 없으니 전부 털기로 했다. 다행히 결제 완료! 그리고 한 가지 더 신기한 거. 오늘도 캐셔는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어린 친구가 담당하고 있다. 근데 옆에 부모뻘로 보이는 사람이 함께 있는 걸로 봐선, 업무 경력을 쌓고 있는 것 같다.
무료 산 터널을 넘어 다시 집으로! 여기는 1차선 터널이지만 짧고 너비도 넓은 편이라 운전에 큰 부담은 없다. 출구 나갈 때만 조심하면 된다.
돌아와 커피를 내리는데 창 밖으로 갑자기 웬 오리가 땅을 열심히 쪼고 있는 게 보인다. 벌레는 아닐 건데 오리가 원래 풀을 뜯어먹던가? 아니, 새가 원래 풀을 뜯어먹나...?
에어비앤비에서 숙소가 참 고요해 보여 예약했는데, 날씨가 흐리기까지 하니 더 고요하고 적막하게 느껴진다.
숙소에서 좀 쉬다가 작년에 묵었던 에어비앤비의 주인인 존에게 인사를 하러 혼자 나왔다. 숙소까지 들어오는 길이 비포장도로인 데다 차가 들어오면 비켜줄 곳이 없어 긴장하며 운전대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다.
안개가 끼면 뷰는 없지만 그만큼 신비함이 더해진다.
존네 집에 도착했다.
존은 쥐덫으로 초인종을 만들었다. 작년에 왔을 때 얘기한 바로는 이것뿐 아니라 집 자체를 본인이 지었다고 했다. 아빠가 목수였다고.
아쉽게도 존은 집에 없었다. 존네 집 사진 앞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Cafe zorva에 들러 저녁과 맥주를 테이크 아웃 했다. 냉장고의 많은 맥주 중 뭘 마셔볼까 하다가 물라포수르에 있으니까 물라포수르 맥주를 사봐야겠지? 마침 마지막 한 병이라 더 유니크해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페로의 맥주는 손님에게 병을 따서 판매를 하도록 되어 있어 음식점에서 맥주만 사 갖고 나오는 게 안 되는데, 그것도 모르고 냅다 맥주를 들고 나와버렸다. (근데 주인도 딱히 제지는 안 했다.)
식당 앞에서 바라보는 공항 뷰. 안개가 이렇게 껴도 비행기는 뜬다.
딱히 민중가요를 좋아하진 않지만, 내게 아이슬란드와 페로에서 운전할 때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래는 이거다.
차를 내일 반납해야 하기 때문에 주유도 가득 채웠다. 40 리터를 주유했고, 가격은 9만 5천 원가량 나왔다. 대략 따져보면 1리터에 2,400원 정도 한다. 정말 비싸다 비싸...
돌아오는 길에 본 Postman's Trail의 시작점. 주차장도 없고 표지판도 낡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이게 트레킹 코스라고? 생각되는 곳이다. 일단 경사가 너무 심해 이게 트레킹을 할 수는 있는 곳인가? 싶은 생각이 드는 곳인데 코스가 지그재그인 것만 봐도 쉽지 않음이 느껴진다. 이 코스는 한 때 고립되었던 가사달루르 마을로 편지를 배달하기 위해 이용했던 고전 루트라고 한다. 아마 여행 중 일반적으로 가는 트레킹 코스 중 난이도로 치면 1~2위를 다투지 싶다.
아니 근데 여기 길이 있는 거 맞아요...? 길이 더 안 보이는데...?
쉬다가 저녁시간이 되어 오랜만에 아빠랑 회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빠가 제일 좋았던 곳은 드랑가니르, 칼소이라고 한다. 제일 맛있었던 음식은 토르스하운의 Haps Burgerbar였고, 클락스비크의 피시 앤 칩스 푸드트럭이라고 한다. 나한테 서운한 게 있냐고 물어봤는데 하나도 없다고 했고, 나는 두어 가지를 말했다. 작게나마 아빠에 대해 더 알 수 있는 시간이었고, 일생에 다시없을 좋은 시간을 함께 보낸 것 같다는 안도감이 든다.
그렇게 페로의 스무 번째 밤이 진다.
페로 제도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