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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Woo Lee Mar 02. 2024

10년의 확신

나는 어떤 기획자인가?

4년 넘게 IT 서비스 기획자로 일하는 중이다. 대학교 때부터 꿈꿔 온 일을 원하던 회사에서 하고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니 참 복된 일이다. 그뿐이랴. 이 일을 하며 멋진 사람과 기회를 많이 만났다. 여러 면에서 괜찮은 사회 초년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마음 한구석에서 아쉬움이 피어났다. 이게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일까라는 의문과 함께.


처음엔 IT 기획이 내 천직이라 여겼다. 그것도 그럴 게 IT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꽤나 계시적이었다.


한참 진로 고민을 할 고등학교 시절 발표된 아이폰. 아이폰의 등장에 세계가 급변했다. 영원할 것 같던 피처폰의 시대가 한순간에 저물고 스마트폰의 시대가 왔다. 앱스토어엔 매일 같이 새로운 앱이 출시되어 사람들의 일상에 파고 들었다.


19년의 인생 중 처음으로 느껴보는 변화의 파고였다. 나도 파도에 올라타고 싶었고 자연스레 IT 업계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스마트폰을 만들든, 그 안에 들어갈 앱을 만들든 무엇이든 좋을 것 같았다.


산업 디자인과에 들어가기 위해 재수를 했고 - 결국 실패했지만 - 대학교 땐 IT 벤처 창업 동아리에 들어가 흥미를 꾸준히 이어갔다. 그 결과 IT 서비스 기획자 혹은 PM이라고 하는 길에 발을 들이게 됐다.


처음 관심을 갖고 취직하기까지 10년 동안 내 진로를 의심한 적이 없었다. IT 업계의 일을 하기 위해서 이 시대에 태어난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취직을 한 후엔 기반 공사가 마무리되었다고 여겼다. 10년 간 다져온 확신 위로 이제 잘 쌓아 올리기만 하면 된다고.


입사 초기 착실히 경험을 쌓았다. 업계 선배와 동료에게 최대한 배우고 흡수하려고 노력했다. 분명 보람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벽돌 쌓는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전만큼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처음엔 직장 탓을 했다. 대기업의 문화가 나와 안 맞다고 느끼고 스타트업으로 몇 차례 이직을 생각한 적도 있다.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회사에 만족하지 못하는 시기가 이어졌다.


고민을 안은 상태에서 IT 서비스 기획자들과 북클럽을 했다. 책을 읽고 각기 다른 회사에서 일하는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난 한 가지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다른 회사에 가더라도 난 만족하지 못하겠구나.’


다른 회사가 안 좋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친구들의 회사는 IT 기획자로서 커리어를 잘 쌓을 수 있는 곳으로 유명했다. 친구들 또한 그 안에서 탄탄하게 경력을 쌓아가고 있었고.


우린 함께 IT 기획 업무 관련된 책을 읽으며 경험을 나눴다. 팀원을 동기부여하고 팀의 목표를 설정하는 방식, 사용자의 데이터를 분석하여 지표를 개선하는 방법 등. 모두 시장이 원하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지식이었다.


지금 당장은 써먹을 일이 없어도 IT 서비스 기획자로 일하다 보면 언젠가 필요할 지식들. 관심을 갖고 습득하려고 했지만 재밌지가 않았다. 책을 수능 언어 지문 읽듯이 봤다.


같은 기획자 친구들은 재밌게 읽는 것 같은데 왜 난 그렇지 않을까. 틈틈이 고민을 했고 우리는 ‘같은 기획자’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일의 시작 지점이 달랐다.


일반적인 IT 서비스 기획자의 일은 시장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에겐 사람들이 뭘 좋아하고 어디에 돈을 쓰는지가 중요했다. 이와 달리 내가 기획한 일은 내 안에서 출발하였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돈보단 내가 좋아하는 일인지가 중요했다.


돌아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 작업은 모두 내 마음에 뿌리를 내린 일이었다. 주로 입사 전 진행한 자유 프로젝트들. 결과적으론 취직에 도움이 되었지만 진행할 땐 구직 신경쓰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지난 10년 간 쌓아온 확신을 해체하여 다시 살펴봤고 스스로를 예술가형 기획자라 정의내렸다. 그러니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문제가 이해되었다.


나는 예술가형 기획자인데, 사업가형 기획자의 방식대로 일을 하고 그들의 기준에 따라 스스로를 평가하니 일에 흥미가 떨어진 것이었다. ‘기획’ 혹은 ‘기획자’라는 같은 이름으로 묶인다고 한 덩어리라 생각한 게 문제였다.


회사가 아니라 나 자신이 원인이니 다른 곳으로 옮겨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직 준비를 하며 진을 뺄 필요가 없었다.


대신 예술가형 기획자로 먹고 살 수 있는 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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