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nWoo Lee Mar 09. 2024

준비물

출판전야의 철학

출판전야를 준비하며 다양한 장소를 탐방했다. 어떤 점이 이곳을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하는 걸까. 한 장소의 매력을 결정하는 것엔 여러 요소가 있었지만 핵심은 운영자로 보였다.


운영자가 어떤 철학을 갖고 장소를 가꾸는지, 얼마나 애정을 쏟고 있는지 드러나는 곳이 기억에 남았다. 그런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면 운영자와 내적으로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고 정을 붙이게 된다.


블루도어북스, 책바, 경일옥 핏자리아 같은 장소가 내게는 그랬다. 장소 곳곳에 운영자의 마음이 묻어 있었다. 운영자의 주관에 따라 선별된 책, 소품, 가구, 칵테일과 피자 메뉴… 이런 것들을 경험하며 손님은 운영자와 소통한다.


이런 장소에는 손님이 방명록과 같은 형태로 흔적을 남기는 경우가 많았다. 장소를 매개로 운영자와 손님이 공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면 김춘수의 시 ‘꽃’의 한 구절처럼 그곳은 손님에게 특별한 곳이 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와 반대편에 있는 공간을 간 적도 있다. SNS에 공유하고 싶을 정도로 멋진 인테리어를 가진 곳이었지만 운영자의 철학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있더라도 깊이가 부족해 보였다. 공간 오픈에 맞춰 급조된 사상누각 같은 느낌.


이런 경우엔 운영자와 손님 간의 공명이 일어나지 않고 공간이 특별해지기 어려워 보였다. 만약 더 화려하고 유행에 부합하는 곳이 나타나면 잊혀질 것이다.


책방, 캔들 나이트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상상헌의 운영자 안나와 나눈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 안나는 상상헌이 물리적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이 있는 곳이 곧 상상헌이라고. 북아현동의 재개발로 상상헌이 위치를 옮기더라도 괜찮은 이유였다.


안나의 말처럼 장소의 매력은 물리적 공간보다는 운영자에 달린 일이었다.


나는 어떤 마음을 갖고 출판전야를 운영하려는 걸까. 돌아보니 그냥 그런 곳이 있으면 좋겠다라는 두루뭉술한 마음만 있을 뿐이었다. 제대로 모양을 갖추지 못한 철학을 다른 사람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리 없었다.


출판전야의 철학을 잘 조각하고 다듬을 필요가 있었고 고독을 시작점으로 삼았다. 출판전야의 주요 키워드인 고독에 대해서만큼은 단단하고 날카로운 관점을 갖고 있어야 했다.


글은 혼자 써야 한다, 혼자 있으면 글이 잘 써진다라는 어렴풋한 생각만으론 부족하다. 고독의 뿌리까지 파고 들자. 왜 우리는 글을 쓰기 위해 고독해져야 하는가. 고독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고독과 관련된 책을 눈에 보이는 대로 사서 읽었다. 주위에선 내가 읽는 책의 표지를 보고는 혼자 있고 싶은 거냐 농담하기도 했다.


관심을 가지니 생각보다 고독을 다룬 책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버지니아 울프, 헤르만 헤세, 에밀리 디킨슨 등의 작가들이 고독에 대해 논하는 글을 읽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책, 자기만의 방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등 뒤에서 지켜보는데 진심이 담긴 글을 쓸 수 있을까. 고독은 거실이나 부엌으로 밀려난 여성이나 온 가족이 어쩔 수 없이 한 방에 살아야 하는 빈자들에겐 요원한 일이었다.


고독의 필요를 이야기하는 신간도 꽤 있었다. 초연결 시대에 사람들이 오히려 고독의 결핍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고독에 대한 작가들의 생각을 엮은 ALONE이라는 책에서 본 구절이 기억에 남았다.

현대인들은 예전보다 더 외로워졌으나 예전보다 혼자 있는 것에 덜 익숙하다.


예나 지금이나 어떠한 이유로 고독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출판전야가 그들에게 마음껏 고독해질 수 있는 은신처가 되길 바랐다.


고독에 침잠하여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자연스레 글이 써지지 않을까. 쓰고 싶은 마음이 고독을 만나면 글이 나온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책 하나 하나 완독할 때마다 뿌듯했다. 출판전야의 가장 중요한 준비물인 내가 쌓여가고 있다는 감각. 내게 영감을 준 책들이 출판전야의 책장에 꽂혀 있을 것을 상상하니 설렜다.

이전 04화 입문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