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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문아 Sep 04. 2022

구운 당근 같은 연애의 권태로움이란

 room 주황.


대학에 입학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시작된 첫 연애는, 꼭 구운 당근을 닮아 있었다.

내가 싫어하는 그 뭉근한 구운 당근을 우물거리며 씹고 있다가, 딱 마지막 조각을 꿀꺽- 삼켜버렸을 때의 그 답답한 후련함.



     난 당근이 싫다. 그 모호하게 단 맛도 쓴 맛도 아닌 물컹함이 싫다. 특히 구운 건 더 싫다. 다른 야채들은 구우면 떫은맛이 날아가고 특유의 풍미가 살아나는데 반해 당근은 구우면 구울수록 뭉글거리는 식감만 남고 떫은맛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이어트를 한답시고 샐러드를 시키면 종종 예쁘게 누워있는 그것이, 참 얄미울 때가 많다.



색깔도 영 맘에 들지 않는다. 싱싱한 당근의 색이 쨍하고 발랄한 오렌지색이라 보는 눈이라도 즐겁다면, 구운 당근은 꼭 사막의 땡볕을 온몸으로 받다 죽어가는 생물처럼 한껏 풀이 죽은 주황색이 되어버린다. 황토색에 가까운 생기 잃은 주황색. 식욕을 더 떨어뜨리는 색이다. '혹시나' 싶어 젓가락으로 집어 입 속으로 밀어 넣어보지만, 연분홍 혀끝에 닿아 파삭 짓물러지는 식감은 '역시나'이다. 표정이 한없이 일그러지는 그런 맛.





대학에 입학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시작된 첫 연애는, 꼭 구운 당근을 닮아 있었다.



 고등학생 때까지 제대로 남자 친구를 사귀어본 적이 없던 나는, 처음 시도해보는 연애에 꽤나 들떠있었다. 연애를 갓 시작한 20대 초반인 내가 마주할 방은 적어도 벚꽃 같은 뽀얀 분홍빛 가득한 곳이겠지, 매일매일이 설이는 일들의 연속이고, 내 눈앞에서는 폭죽처럼 행복이 터지는 일상이 반복되겠지-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나날이었다.  



흔히 말하는 '날 더 좋아하는 사람'과의 연애였다. 모임에서 몇 번 얼굴을 익히고 술자리를 가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저 사람이 날 좋아한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모임 사람들과 다 같이 식당을 들어갈 때마다 내 뒤로 바싹 붙어 쫓아 들어와 내 옆자리를 사수하려고 하거나, 그러면서도 안달복달하며 내 빈 물컵에 물만 계속 따라주던 모습. 인간의 이마에 상대방에 대한 호감을 표시하는 그린라이트가 달려있었다면, 이마가 찐 초록으로 물들어있었을 것 같은, 그의 달뜬 표정들. 그 모든 것이 나에 대한 그의 관심을 말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그의 마음을 모른척하면서도 몇 번의 만남을 가졌고, 결국 평범한 고백을 받았다. 내 여자 친구가 되어주겠니-? 따위의. 미적지근한 감정, 분홍 물이 다 빠진 애매한 색으로 시작한 감정이었지만, '한 번 해보지, 뭐.'라는 마음으로 고백을 받아들였다. 어쨌든 처음 시작하는 연애에 조금은 설레었고, 어쩌면 그렇게 만나다 보면 더 좋아지겠지- 하는 막연한 추측도 있었다. 그렇게 몇 년간 지극히 평범한 연애를 했다. 상대방이 날 더 좋아하는 연애. 끊임없이 그가 내 눈치를 보는 연애.




핸드폰에 적힌 d day 날짜가 자릿수를 점점 늘려가면 갈수록, 내 마음은 서서히 풀이 죽어갔다. 카오톡에 매일 찍히는 '사랑해'라는 문구가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가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고 하면 오히려 반가웠다. 그동안은 연락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이상하게도 크게 싸우거나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도, 만나면 즐겁게 웃고 떠드는데도, 이 연애를 '사랑'이라고 정의 내리기에는 늘 확신이 없었다. 분홍도, 빨강도 되지 못한 내 마음은 오히려 주황에 가까웠다. 하루하루 같이 지낸 날짜가 쌓여갈수록 사랑보다는 '정'으로 관계를 어영부영 이어 붙여가고 있었다.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신의 직장'이라고 불리는 공기업에 취직하게 되면서, 나는 나름 내 인생에 '리즈시절'이 열렸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었다. 대학교에서도 아싸를 자처하던 나에게 처음으로 주어진 넓은 인간관계,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 동료들과 퇴근 후 함께 노는 그 시간이 가장 즐거웠고, 회사에서의 구성원으로서 하루하루 인정받는 성취감은 더할 나위 없이 달콤했다. 연애를 하지 않아도 행복했고, 남자 친구가 곁에 없어도 외롭지 않았다. 회사 동료들과 저녁 내내 술을 마시고 놀러 다니느라 남자 친구에게 카톡 한번 하지 못하는 날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주말에 만나기로 한 약속을 잊고 잠을 자다가 1시간이나 늦게 약속 장소에 나간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나를 이해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보였지만, 내 눈치를 보며 오히려 미안하다며 자신을 꾹 억눌렀다. 그렇게 또 몇 달의 관계 생명이 연장되어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의 관계에는 점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적어도 선명한 주황빛이었던 나의 마음이 점점 탁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날, 그의 핸드폰을 무심히 들여다보던 내 눈에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남자 친구의 친한 여자 사람인 A의 프로필 사진이었다. 그녀는 그와 다정하게 함께 찍은 사진을 당당히 프로필 사진으로 걸어두고 있었다. 나는 그걸 보자마자, 눈을 세모로 뜨고 그에게 따져 물었다.


"왜 이 여자가 오빠를 프로필 사진에 올려놔?"


"아, 그거 걔 전남친한테 복수한다고 올려놓은 건데, 그럴 수도 있지..."


그는 심드렁했다. 내 눈치도 보지 않았다. 오히려 흘겨보는 내 눈을 바라보며, 야속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가 왜 화를 내냐는 눈빛. 지금 네가 화를 낼 상황이냐는 말투.


"나 기분 나빠. 무시당하는 거 같아. 누가 보면 이 사람 남자 친구인지 알 거 아냐."


 "알겠어. 싫으면 내리라고 할게."


그는 당장 A에게 사진을 내리란 카톡을 하고서 나에게 증명하듯 보여줬다.  A는 짐짓 쿨한 척을 하며 '아 그래? ㅋㅋㅋㅋㅋㅋ 알겠어.'라고 하고는 사진을 바로 내려주었지만, 나는 그 카톡이 꼭 우리의 마지막을 장식할 신호탄 같아 보였다. 그때 우리의 관계는, 우리의 마음은 연인의 그것이 아니었다. 누가 먼저 이 관계의 결승선을 끊을지, 하얀 테이프를 끊어버릴 가위를 누가 먼저 손에 쥘지를 서로 눈치 보고 있는 상황일 뿐이었다.



결국은 내가 손에 가위를 들었다.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 것 같기도 했다.







 마지막을 말하는 날은, 아주 어렴풋한 기억만 남아있다. 어려운 시험을 앞둔 사람처럼 무거운 돌덩이를 마음에 얹고, 그날 하루가 빨리 끝나기만을 빌었던 기억이 난다. 헤어짐을 앞둔 연인이 으레 그렇듯 우리도 몇 주간의 시간을 가졌고, 간만에 어느 공원 벤치에서 마주한 그의 얼굴은 꼭 형벌을 앞둔 죄수처럼 경직되어 있었다. 나는 꼭 내 손에 든 가위가 우리의 관계가 아니라, 그의 생명줄을 끊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짐짓 괜한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말을 한 자 한 자 뱉어내면 낼수록 그 사람이 정말 처절하게 눈물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어렸던 나는, 그래서 더 끝을 내기가 무서웠다. 내가 말을 다 마치면 그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글쪼글해져, 어딘가로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그가 많이 울었고, 난 한 방울도 울지 않았고, 말을 끝맺자마자 내가 다급히 일어났던 기억만 남아있다. 갈 방향도 아닌  그 사람의 반대 방향으로 무작정 걸어가면서, 그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온 장문의 메시지를 삭제하면서, 그저 먹먹한 후련함만을 느꼈다. 내가 싫어하는 그 뭉근한 구운 당근을 우물거리며 씹고 있다가, 딱 마지막 조각을 꿀꺽- 삼켜버렸을 때의 그 답답한 후련함. 당근은 내 입에서 사라졌지만, 입안에는 계속 남을듯한 그 찜찜한 달짝지근함.



 그날 이후, 그의 울먹거리던 마지막 모습이 꼭 그 구운 당근처럼 마음에 남아있었다. 그 들쩍지근한 주황색 방을 벗어났지만, 한동안 그 주황색 잔상은 내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

지금은 그 어딘가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그의 얘기를, 다시 이곳에 꺼내는 것이 꽤나 예의가 아니며, 미안한 일인 것임을 안다. 그저 그 당시의 내 감정의 소회임을, 변명처럼 얘기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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