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문아 Mar 28. 2022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데이트를 했다.

room 연분홍.

얼굴도 보지 않고 시작한 만남이 만족스럽게 진행될 확률은 거의 0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의 반 포기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괜히 궁금했다.

에라, 모르겠다. 모 아니면 도다. 28년 INFJ 인생 중 처음으로 해본 '모 아니면 도'였다.



연애를 쉰 지 2년째였다. 호되게 데었던 전 연애를 끝으로, 어쩌면 이대로 비혼주의자가 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연애에 큰 관심이 없었다. 나는 나름 찬란한 솔로 생활을 즐기며 자기 계발과 취미생활에 집중했고, 덕분에 자존감이 200%는 채워진 안정형의 인간으로 28살의 초여름을 지나고 있었다. 


미리 말하건대, 나는 내향인이다. 그것도 MBTI에서 I(내향성) 100% 나오는 내향인 그 자체이다. 거기다가 INFJ다. 낯선 사람에게 잘 다가가지도 못하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경계심도 심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자연스럽게 '인만추(인위적인 만남 추구)' 보다는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 스타일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변 친한 친구들이 삼삼오오 자기 짝을 찾아 떠나면서 슬슬 옆자리가 휑하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특히 가장 친한 직장동료가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했을 때는, 정말이지 눈물이 날 뻔했다.) 하지만 매일 같은 회사로 출근해서 같은 사람들을 마주하고 있그때의 나는 '자만추'가 가능한 상황이 아니었다. 근데 그렇다고 '인만추'도 쉽게 되느냐? 절대 아니다. 인스타그램 같은 SNS도 안 하고, 화려한 셀카를 걸어둔 프로필 사진 하나 없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이상하게 나한테는 소개팅이 들어와도 번번이 만나기도 전에 불발되고는 했었던 것이다.

 

그렇게 옆자리 휑하게 비워두고, 심심하다고 되뇌던 어느 날. 데이팅 앱을 깔아보았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흔하게 쓰는 어플부터 시작했다. 그나마 내 사진 중 가장 잘 나온 사진을 걸어놨지만, 한 열흘 넘게 깔아놓아도 매칭이 되는 사람은 없었다. 현타가 와서 이런저런 다른 어플 리뷰를 보다가, 희한하게 '프로필 사진을 올리지 않는 데이팅 앱'이 눈에 띄었다.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해볼까- 싶어 깔고, 무료 광고 몇 개를 보아 무료로 상대방의 프로필을 몇 개 받아보았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OOO입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아무개와 매칭이 되었다. 그는 대화방이 열리자마자 대뜸 통성명부터 했다.

이런 익명의 누군가와 인터넷 만남 같은 것을 하고 있다니.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최대한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상한 놈인 게 1%라도 보이면 당장 어플을 지워버리고, 잠수를 타버리리라.


"네! 제 이름은 OOO이에요. 반갑습니다."


"이름이 예쁘시네요! 제 이름은 OOO입니다!"


...? 이름을 왜 두 번 말해? 매크로인가? 


잠깐 멈칫했다. 매크로거나, 아니면 채팅방 5개를 동시에 돌리는 문어다리남이거나. 두 가지 다 이상한 사람일 테니 긴장을 풀고 편하게 수다나 떨기로 했다. 그때는 그다음 날이 석가탄신일인 아주 여유로운 연휴 전야였고, 그래서 나도 조금 마음의 여유가 생겼던 것 같다.


"영화 좋아하세요? 어떤 영화 좋아하세요?"

매크로남은 적극적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나도 리액션에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INFJ. 질 수 없었다.


"저 500일의 썸머 좋아해요. 그리고 인셉션, 디즈니 영화 좋아해요."


"어, 저도 500일의 썸머, 인셉션이 인생영화인데! 디즈니 영화도 다 좋아해요. 와, 이거 진짜 인연인데요?"

애쓴다, 당시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난 꽤나 방어적으로 대화에 임했음에도, 대화는 끊어지지 않고 2~3일간 이어졌다.


영화 이야기, 학창 시절 이야기, MBTI 이야기. 매크로남은 계속 적극적으로 대화를 이끌어갔고, 내 이상형을 물어보거나, 대화가 너무 재밌다고 어필하는 등의 플러팅(?)도 서슴없이 했다. 그럼에도 내가 '대화방 나가기'를 클릭하지 않은 건, 그가 그렇게 플러팅을 하는 와중에도 예의와 선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INFJ에게 있어 예의는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라고 자부할 수 있다.) 사진을 올려놓지 않는 해당 어플의 특성상 얼굴이 궁금할 텐데도 '사진 한 번 보여줘요.'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강남 어디에서 만나서 술을 먹자느니, 클럽은 좋아하냐느니 등의 내가 가장 싫어하는 주제는 일절 입밖에도 꺼내지 않았다.


매크로남의 MBTI는 ENFP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아주) 조금 정신이 없지만 해맑은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걸그룹 이달의 소녀 '츄'가 ENFP라고 들은 적이 있는데, 딱 그 사람의 남자 버전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았다. 너무 해맑아 보여서 경계심이 풀어진 것도 없 않다.


그렇게 대화는 매일 새벽까지 이어졌고, 나는 매일 3시간밖에 자지 못하고 졸린 눈으로 출근을 했다.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아도 늘 어플 알람이 뜨는 순간이 기다려졌다.


그렇게 며칠을 더 보내, 얼굴이 너무 궁금했다.

얼굴도 보지 않고 시작한 만남이 만족스럽게 진행될 확률은 거의 0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의 반 포기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괜히 궁금했다. 매크로남을 실제로 만나보고 싶어졌다.


"그럼 만나서 서로 별로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이 대화방을 나갑시다. 마음에 들면 연락처를 남기는 거구요!"


그는 이렇게 제안했다. 텍스트에서 묘한 자신감이 피어올랐다.





그를 만나기로 한 날, 약속시간 30분 전까지 나는 끊임없이 고민했다. 아니, 나 자신에게 자조적인 웃음이 났다. 드디어 미쳤구나, 드디어 미쳐서 미친 짓을 다하는구나.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나서 사람 만나기 어려워진 시대에 어플로 연인을 만나는 경우가 흔하다지만, 세상 걱정쟁이 INFJ 머릿속은 늘 최악의 시나리오만 상상했다.

'갔더니 변태면? 프로필이 다 가짜였고, 유부남이면 어떡하지? 내 집 앞까지 바래다준다고 하고 추근덕거리면 어떡하지?'


그리고 걱정을 더 돋운(?) 친구들의 팩폭.

'야, 그런 데서 얼굴도 모르고 만나는 사람이 제대로 된 사람이겠냐?'(그럼 네가 소개팅을 좀 시켜주던가,라고 대꾸하고 싶었다.)


어쨌든 그를 만날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마침 그날 출장을 가게 되어 정신없는 일정을 소화한 탓에 허겁지겁 약속 장소인 지하철역에 내렸다. 심지어 약속 장소를 착각하여 다른 역에서 내려, 급하게 다시 갈아타고 도착한 참이었다. 그 정도 상황이 되니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모 아니면 도다.


28년 INFJ 인생 중 처음으로 해본 '모 아니면 도'였다.




이전 12화 "살은 언제 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