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세미 너는, 버튼을 못 봤다는 거지."
주원은 울먹거리던 눈을 비비며 말했다. 세미의 꿈은 독특했지만, 어쨌든 파란 버튼을 보지 못한 것은 세미도 똑같았다. 주원 또한 꿈에서 버튼은 보지 못했다.
"이서, 지영. 너네는?"
주원은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해 비몽사몽인 이서와 지영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이서는 주원의 물음에 잠시 토끼눈을 하더니,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영도 옆에서 조용히 고개를 가로젓자, 이서는 만지작거리던 핸드폰을 내려놓고는 갑자기 신경질을 내기 시작했다.
"거봐, 헛수고랬지. 이주원 네가 책임져라."
"뭘, 내가 책임져?"
주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맞받아쳤다. 세미는 주원의 팔을 잡아끌며 그러지 말라는 듯 주원을 말렸다.
"네 말만 믿고 여기 온 거 아냐. 니가 정현우인지 뭔지 그 찐따한테 들은 얘기에 신나서 끌고 온 거잖아."
이서의 말은 공격적이었다. 지영은 가방을 챙기다 말고 조용히 이서의 손을 잡았다.
"이서야, 그렇게 공격적일 필요가 있어?"
지영은 이서에게 넌지시 말했다. 손을 잡힌 채 그 말을 들은 이서는 맥이 풀린 듯 잠시 주원의 어깨너머를 흘기듯 건너다보았다. 지영의 말투에는 다정하면서도, 상대방의 맥이 풀리게 하는 그 어떤 장치가 있는 것 같았다. 입마개를 씌운 말티즈처럼 온순해진 이서는 지영의 손을 작게 뿌리치며 건너편에 있는 에코백을 어깨에 둘러맸다.
"아무튼, 난 간다."
이서는 주원의 어깨를 툭-치며 지나가더니, 이내 방문을 열고 사라졌다. 끼익 거리는 낡은 현관문이 열었다 닫히자 더운 바람이 남겨진 셋의 얼굴 위로 훅 불어 들어왔다. 주원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흔들고는, 이내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간밤에 끌어안고자 엉망이 된 이불을 정리하고, 주변에 널브러진 짐들을 모아 가방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세미는 주원 옆에서 엉거주춤 주원을 도왔고, 지영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누런 벽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세미는 꼭, 자신의 꿈속에서 봤던 지영의 모습 같아 그 뒤통수를 보는 것이 꽤 거북했다.
짐을 다 챙긴 주원이 다시 현관문을 열었다. 세미, 지영도 주원의 뒤를 따랐다.
그들의 첫날밤, 그들은 아무도 파란 버튼을 보지 못했다.
***
스타벅스 구석에 자리를 잡은 이서는 자신의 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헐레벌떡 마셨다. 이서의 입에서 자연스러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 살 것 같다."
"뭘, 그렇게까지."
맞은편에 않은 지영이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소리로 웃었다.
"야, 그 귀신 나올 것 같은 데서 하루를 꼬박 새다왔는데, 살 것 같지, 안 살 것 같냐?"
"너 밤샜어?"
지영도 눈앞에 놓인 아이스 자몽티를 한 모금 마시고는, 가라앉은 자몽 과육들을 빨대로 이리저리 휘저었다.
"아니, 잤어. 바로 잤는데? 넌?"
이서는 아메리카노를 입에 우물거리며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지영은 여전히 과육들을 휘저으면서, 이서의 질문을 곱씹으려는 듯 천장으로 고개를 들었다. 음- 하는 신음을 한참 내던 지영은, 이내 이서의 눈을 찬찬히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 두어 시간쯤?"
"엥- 거의 못 잤네?"
이제 바닥이 드러나 얼음 속 공기들이 부딪히며 후룩, 후루룹, 하는 소리가 나는 빨대를 계속 빨아들이면서, 이서는 심드렁하게 되받아쳤다. 이서는 한 잔 더 먹지 않으면 여기서 잠들어버릴 것 같다고 말하고는, 가방에서 분홍색 가죽으로 된 카드지갑을 꺼내 손에 들었다. 카운터로 걸어가 꽤 그럴듯하게 주문을 하는 이서를 바라보던 지영은, 이서가 자리에 돌아오자마자 이서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 꿈은 꿨어?"
이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꿨는데 기억 못 하는 걸 수도.'하고 첨언했다. 이서는 지난밤 주원이 꿨다는 꿈을 상상해 보았다. 주원의 할아버지가 나와서 역정을 내는 꿈. 당장 죽어버리라고 종용하는 꿈. 현우 말대로 주원의 꿈에서 파란 버튼이 나온다면, 왠지 모르게 그 버튼은 역정을 내고 있는 할아버지의 손바닥이나 정수리 꼭대기에 있을 것 같았다. 그걸 냅다 누르는 주원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이서는 잠시 상상했다. 저기, 할아버지. 머리숱이 너무 없어서 버튼이 미끄러져요. 제발 가만히 계세요. 이서는 흥미롭다는 듯 어깨를 들썩거리며 킥킥 웃었다. 지영이 '왜-' 하고 묻는 말에 아니야,라고 답하면서도 이서의 웃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웃기지 않냐."
"뭐가."
지영이 그만 웃으라는 듯 손바닥으로 책상을 가볍게 톡톡 쳤다. 이서는 겨우 웃음을 진정하고, 카운터에서 '배이서 손님,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하는 소리가 들리자 총알처럼 튀어나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리필해 왔다. 이번에는 아주 조금, 한 모금을 들이마시며 이서가 말을 이었다.
"꿈에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버튼이 나온다는 거. 말이 되냐고. 그럼 사람들이 뭣하러 힘들게 높은 데서 뛰어내리고, 약 먹고, 물에 빠지고 그 난리를 치냐? 그냥 그 펜션 가서 방에 죽은 듯이 누워있으면 버튼이 나와서, '나 눌러줘-' 하고 있으면 알아서 눌러서 죽으면 된다는데."
"글쎄. 근데 실제로 그 펜션에서 집단자살이 많았대잖아."
"야, 그건 정현우 말이지. 박주원 말이고. 걔네가 찾은 기사라고 뭐 현장사진도 없는 그냥 싹 다 쓰레기 언론사 찌라시더만."
"근데, 넌 왜 같이 가자 한 거야?"
지영은 이서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이서는 그런 지영의 눈을 피하며, 양쪽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눈으로 계속 훑고 있었다.
"재밌잖아."
이서는 빨대에서 입을 떼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지영은 작게 헛웃음을 짓고는,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지영은 단전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하품을 애써 참으며 다시 한번 이서에게 물었다.
"그냥 재밌어서?"
이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지영의 물음에는 미약하게나마 공격적인 기운이 풍겼다. 이서는 왜 항상 지영이 자신에게 공격적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영은 늘 꼭 말 안 듣는 강아지를 훈련사에게 맡기려는 주인처럼 굴었다. 우리 개가, 심성은 착한데 사람을 물어요. 말을 안 들어요. 어허- 기다려. 안 돼! 이서는 자신이 강아지가 되어 지영을 물어뜯는 상황을 상상했다. 이번에는 어쩐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재밌... 다기 보단, 그런 걸 믿는 박주원이 웃겨서.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이서는 다리를 꼬며 말을 계속 이어갔다.
"아까 말했듯이, 죽는 게 그렇게 쉽다면 누구나 다 죽음을 선택할걸? 다들 죽지 못해 산다고 하잖아. 당장 고통 없이 편하게 죽는다고 하면 누구나 다 당장 버튼을 누를 거라고."
이서는 다리가 불편한 듯 부자연스럽게 다리를 풀었다가, 이번에는 반대로 다리를 꼬았다.
"그럼 너는, 누를래?"
지영은 카페 테이블 옆에 파랗게 반짝이고 있는 멀티탭 전원 버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서는 지영의 손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난 한 달간 주원에게 파란 버튼에 대해 거의 강의를 듣다시피 한 지영과 이서였지만, 돌이켜보니 그 버튼이 정확히 어떻게 생긴 건지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 파란 버튼은 아마 저렇게 생겼을 거라고, 이서는 생각했다.
"난, 당연히 누르지."
"왜?"
"아시다시피."
이서는 어깨를 으쓱였다. 지영도 익히 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서는 죽고 싶다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사는 아이였다. 학교에서도 아침부터 책상에 엎드려 서럽게 우는 날이 많았고, 갑자기 수업을 들을 수 없는 지경이라며 양호실에 누워있는 날도 잦았다. 최근에는 부모님과의 갈등을 핑계로, 우울증이 더 심해졌다며 매일 약통을 가져와 약을 한 움큼씩 입에 털어놓고는 했다. 주변 친구들이 놀라며 말려도, 이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아이스아메리카노와 함께 약을 꿀덕꿀덕 삼키곤 했다.
잠깐의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가고 있던 그때, 이서의 핸드폰 화면이 반짝하고 빛났다. 이서는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고는,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엄마임. 가자."
"왜, 집에 오래?"
"엉-, 가족식사 한다고, 당장 오랜다. 밥 안 먹으면 죽기라도 하나 봐."
이서는 작게 씨발-하고 덧붙였다. 지영은 야, 하고 작게 이서를 타박하며 소리 내 웃었다. 이서는 '뭐, 어때.' 하고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카드지갑과 커피를 양손에 든 채, 지영에게 짧게 손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떡진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넘기며 카페를 나서는 이서를, 지영은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서 손에 들린 지갑을 쳐다보며, 지영은 지갑에 훤히 박힌 브랜드 로고를 읊어보았다. 요즘 명품 좀 안다는 20대들에게 유행하는 브랜드였다. 지영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눈앞에 놓인 자몽티를 몇 모금 더 마신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