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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 제 것으로서의 자신
Mar 10. 2024
"3주동안 명상마을에 있을 때 말이야. 제일 견디기 힘들었던 게 뭐였는지 알아?
고기 못 먹고 채식만 하는 것? 사람들이랑 같이 술 마시고 수다 떨지 못하는 것? 그런 건 다 괜찮았어. 제일 힘든 건 바로 라떼를 마시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지.
사실 좋은 드립 커피 많이 마셨어. 스님께서 향기좋은 예가체프 원두커피로 드립 커피를 기가 막히게 내려주셨거든. 평소 마셔보지 못한 좋은 차도 마셨어. 60년, 40년 된 보이차, 진한 구기자차, 스페인 왕실에 들어간다는 카모마일 차... 거기서 마신 모든 차나 커피 모두 너무 좋았어. 정갈한 개완 찻잔과 커피잔에 온도 딱 맞춘 차와 커피. 귀족같이 대우받는 기분도 느끼곤 했어.
그런데 이상하게 라떼가 너무 마시고 싶은 거야. 뽀얀 거품이 소복히 올라간 라떼, 두유가 들어간 고소한 라떼. 흰 거품을 뚫고 나오는 커피 향과 쓴 맛. 그건 명상센터에 없는 거였거든.
명상을 하다가 도저히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봤었지.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커피숍이 10킬로 떨어져 있더라고. 차로는 15분 거리. 차를 가지고 왔다면 아무도 몰래 잠깐 나갔다 올 수 있는 거리인데. 도보로는 2시 반 반, 왕복 5시간. 하, 바로 포기했지.
나중에 직원분이랑 친해서서, 장 보러 가실 때 나 좀 같이 데리고 나가 달라고 부탁드렸어. 그분 장 보는 한 시간 동안 커피숍에서 라떼 한 잔 마셨는데, 아 그때의 행복한 기분이란.
달콤한 케이크 향, 고소한 버터 들어간 갓구운 빵과 설탕과 크림 가득 케익 냄새, 막 내린 커피 향, 알록달록한 크리스마스 장식들과 잔잔한 음악. 그리고 내가 원한 부드러운 라떼 한 잔. 그게 왜 그리 좋았을까."
"달달한 게 필요해서 그런 거 아니었을까?"
"아니, 거기 초콜릿도 있었고 간식거리는 언제나 있었거든. 달달한 게 필요했으면 거기서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지. 커피가 필요한 것도, 달달이가 필요한 것도 아닌 라떼 한 잔 그 자체였어. 아 그 라떼 한 잔 때문에 난 영원히 출가는 불가능이겠구나 그런 생각까지 들더라고. 넌 그런 거 없었어?"
"흠, 난 딱히 그런 건 없었는데. 그런데 예전에 나 태국에 명상수행 일주일 했을 때였어. 일주일 마치고 딱 문을 나선 날 바로 마셨던 파인애플 주스가 잊히지 않아. 온몸에 그 파인애플 주스가 바로 확 퍼져서 바로 혈관에 흡수되는 그런 기분. 그 시원한 주스 한 잔이 잊히지 않아."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라떼가 있는 게 아닐까. 자신의 내면을 파고드는 진지한 명상 중에 나를 흔들어대는 아주 작은 것 하나, 나를 온전히 놓지 못하게 하는 매우 사소한 것. 세상과의 연결끈 온전히 놓지 못하게 하는 그 무언.
왜 라떼였는지도 모르겠다. 친구에게도 절대 잊혀지지 않는 파인애플 주스 한잔의 시간처럼.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라떼, 주스 한 잔의 에피소드가 있을까.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오니, 온통 내 집중을 흩트리는 것들 투성이다. 전화와 문자, 별의별 소식, 해야 할 일들, 이런저런 모임, 신경거슬리는 얘기들. 내 마음을 고요히 붙들어두기가 너무나 힘들다. 지쳐 집에 돌아오면, 명상은커녕 화장 지우지도 못하고 잠들기도 하고.
서울 골목길마다 있는 커피숍, 지금은 언제 어디든 편하게 마실 수 있는 라떼.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시며 생각하곤 한다.
내 마음 붙들어둘 정말 중요한 것 하나 무엇 있을까. 내 마음 흔들어대는 모든 것으로부터 나 자신 굳건히 지켜낼 무엇 하나, 무엇 있을까.
하루하루 살아가는 건, 그 답을 찾는 과정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