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암 진단 후 진짜 나를 찾아가기
인간 존엄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외적인 어떤 조건 속에서도 개개인이 내면의 요구에 따라 사는 것, 즉, 가장 자기답게 살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진단을 받는 순간 본인의 인간적인 기본 욕구에 대한 자기 결정권 박탈, 수동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진단을 받은 후의 삶은 여러 가지 면으로 예전과 달라졌음을 느끼게 된다. 다시 예전과 똑같이 돌아가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예전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지금은 관심을 갖고 깊이 생각하는 부분도 생겼을 것이고,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잠이 안 오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자존감, 건강한 정신 성립에 방해한다. 어떻게 하면 존엄성을 유지할 것인가? 이러한 생각들이 나를 힘들게 만들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보다 건설적인 생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한 대답은 아마도 인문학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철학, 예술의 영역에서 영감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철학과 예술이 가장 인간으로서 이상적인 상태로 가기 위한 다리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다음은 가장 나다운 삶을 살기 위해 생각해보면 좋을 철학적인 질문들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진정한 나와 만남의 시간을 가지어 보자. 나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은 자긍심 회복에 도움이 된다.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할 수도 있다.
처음에는 조금 둔탁해도 괜찮습니다. 여러 번 수정을 해 보면 꽤 괜찮은 생각이 나올 것입니다. 가장 많고 가장 깊은 생각을 하는 시기일수록, 감정의 가장 밑바닥까지 느끼는 시기일수록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면 답을 찾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나는 누구인가?
나의 역사를 생각해보세요. 나는 어떤 일들을 경험했나요?
나는 어떻게 지금의 나의 삶을 살고 있나요?
나의 역할은 무엇이 있나요?
나는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나요?
-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철학을 가지고 살 것인지 생각해보세요.
지금의 이 힘든 과정을 더 건강하고 더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 나는 어떻게 아름답게 살 것인가?
나는 어떤 상황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나요?
아름답게 느껴지는 부분이 변화하지는 않았나요?
내가 추구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 나는 앞으로 어떻게 건강하게 살 것인가?
나는 현재 마음, 몸, 정신이 건강한가요?
보다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건강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진단 이후 나를 힘들게 하는 많은 일들이 있다. 신체적, 사회적, 심리적 모든 부분에서... 어려움을 토로하는 환자분이 오시면 되도록 잘 들어드린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의 위로를 많이 받는다고 한다. 그래도 ‘어떻게 살면 좋냐’고 물어보시는 분이 계신다. 그때 난 오히려 묻는다. “어떨 때 행복하세요?” 이 질문에 마치 봇물 터지듯 본인의 이야기가 터져 나온다. 그리고 삶을 다시 살아갈 용기와 힘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 없게 휘어져 있던 허리와 목이 가볍게 펴진 자세로 상담실을 나가신다. 이렇게 나에 대한 성찰은 중요하다.
내가 만났던 유방암 수술받은 분들 중에서도 훌륭하게 자신을 찾아 간 분들이 있다. 진단을 받고 나서 많은 분들이 새 삶을 얻었다는 얘기를 한다. 그래서 이 일을 계기로 나다운 나로 살기로 결심한다. 그분들 중에서는 웃음치료사가 된 분도 계시고, 그동안 하고 싶었던 라틴 댄스를 배워 화려하게 추시는 분도 계시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택하는 분도 계신다. 이들은 질병에 무너지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킨 분들이다.
이 분들의 공통점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찾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들이 모두 다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역할을 정립해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춤도 봉사도 웃음치료도 모두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다시 나에 대해 사색하게 된다. 결국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나 자신과의 만남 속에서 인간 존엄성을 지킬 힘을 찾을 수 있다.
간호학자 마이라 에스트린 레빈은 나답게 살기 위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보존’이라는 언어로 표현하였다. 보존을 한다는 것은 인간 존엄성을 유지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고 보았다. 보존이 되어야 하는 영역은 다음의 네 가지이다.
- 에너지 보존 : 생명활동을 유지하기 위해 에너지의 균형과 지속적인 에너지의 회복이 필요하다. 치유와 노화 등의 과정은 그러한 에너지에 영향을 미친다.
- 신체 구조적 통합성의 보존 : 치유는 구조적 기능적 통합성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몸에 이상이 생겼을 때 새로운 수준에서 적응을 해야 한다. 기능적인 이상을 조기에 인식한다면 병에 노출된 범위를 줄일 수 있다.
- 자신의 정체성 보존 : 자신에 대한 가치와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질병이 나타나면 이러한 부분이 취약해진다. 질병을 겪는다는 것은 사생활 침해와 불안과 함께 발생하게 된다. 개인의 사생활을 회복할 수 있도록 지식과 활력이 부여되어야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한다는 것은 각 개인의 신성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 사회적 통합성 보존 : 생명은 사회적 공동체를 통하여 의미를 부여받으며 건강은 사회적으로 결정된다. 가족 구성원, 종교, 대인관계 기술 등이 주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작용된다.
진단과 치료를 받는 과정은 개인의 방어선에 위협을 가해 위의 네 가지에 모두 영향을 끼친다. 이 네 가지 영역과 관련해 나의 상황을 생각해보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어떤 부분을 신경 써야 하는지 따져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에너지 보존이 잘 되지 않으면 피로를 느낄 수 있다. 나의 피로 정도는 10점 만점에 어느 정도인가? 신체 구조적 통합성이 보존되지 않으면 통증을 느낄 수 있다. 몸의 어느 부분이 얼마나 어떻게 불편한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매슬로우의 인간 동기 이론에 따르면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는 가장 상위 수준의 욕구인 자아실현의 전제 조건이 된다고 하였다. 몸이 낫는 것은 존엄성 회복에 매우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몸이 아픈 것이 회복되는 것과 투병과정에서 손상된 삶의 질이나 존엄성이 회복되는 것은 별개의 논리로 성립된다. 나이팅게일도 고통의 원인은 종종 질병 자체에서 기인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들의 결여로 발생될 수 있다고 하였다. 진 왓슨은 인간의 욕구는 복합적이고, 개인이나 집단에 따라 하위 순위의 욕구 충족 만으로는 최적의 건강을 얻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상위 순위의 욕구 성취, 연대, 자아실현에도 관심을 갖아야 한다고 하였다. 인간의 욕구는 총체적-역동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레빈이 말한 자신의 정체성 보존 및 사회적 통합성 보존의 중요성과 연결된다. 진정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나다운 나를 잃지 않고 나에 대한 탐색을 해야 한다. 또한 레빈의 말처럼 자신에게 지식과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일들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 사회적 통합성이 보존되어야 한다.
너무나 모범적인 사례로 신영복 선생님의 이야기가 있다. 그분은 실체도 없었던 죄를 지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분이었다.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고통 안에서도 고매한 정신을 놓지 않았던 분이다. 신영복 선생님의 글을 읽다 보면, 세상에 못 이길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존엄한 인간이기를 20년의 복역생활 속에서 포기하지 않았던 그였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분명 고통스러운 상황인데도 부드러움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내면의 힘으로 오히려 읽는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느낌을 받는다. 이 순간 가슴속에서 피어나는 따뜻함이란 감격 그 자체이다.
그가 그러한 힘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신영복 선생님의 삶의 자세를 배운다면 우리도 그러한 힘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그분의 힘의 원천에는 풍부한 학식과 진지한 배움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힘은 편지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 달에 한 번씩 허용된 조그마한 엽서 한 장으로 가족, 감옥 바깥의 사람들과 소통하였다. 그에게는 책을 읽고 자신과 세상에 관한 사색을 하였다. 조금씩 더욱 성숙한 인간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 줄 사람이 있었다. 누군가와 소통할 수 없었다면, 그의 글을 읽어줄 사람이 없었다면 그가 계속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색을 할 수 있었을까?
오랜 세월 그분의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의 만남도 그 힘이 되었다. 지금까지 주로 만나왔던 사람과는 다른 감옥 안의 주변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인간에 대한 사색을 하였다. 주변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던 것도 그 모든 것을 소중하게 생각한 것도 가장 그 다운 모습이었다.
편지와 내 주변 사람과 만남과 소통이 이루어졌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그 만남은 또다시 자신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인간적 존엄성을 유지한다는 것의 가장 큰 힘은 결국 만남과 소통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철학자 부버는 <나와 너>에서 ‘나’와 ‘그것’이 아닌 ‘나’와 ‘너’의 관계가 진정한 소통이라고 한다. ‘나’와 ‘그것’은 나의 일방적인 소통인데 반해, ‘나’와 ‘너’ 사이에는 상호적인 ‘사랑’이 존재하고 이는 ‘너’에 대한 ‘나’의 책임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정신은 ‘나’가 아닌 ‘나와 너 사이’에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계는 인간관계뿐 아니가 예술의 영역에도 적용된다. 예술은 이를 ‘너’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향해 말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예술과 대화적인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 관계는 인간과 인간의 사이이다. 부버는 ‘나-너’ 관계에 있는 인간을 자유와 운명이 만나는 가운데 삶의 의미가 부여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일은 병원에서도 자주 목격된다. 간혹 병원에서 환자들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주세요. 나의 이야기를 정말로 이해한 건가요?’라는 말을 한다. 환자의 절절한 고통을 의료인들이 눈치 채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환자와 의료인 둘 중 한쪽은 일방적인 의사소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바쁜 현대 사회에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의사소통하기는 현실적으로는 힘들다. 그러나 환자와 의료인 서로 한 인간으로서 책임을 의식하여야 한다. 서로를 성장 가능한 중요한 인격체로 인식하여야 한다. 이 가운데 상호적인 소통이 이루어진다면 분명 보다 긍정적인 의사소통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