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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Jan 09. 2021

겨울 기억

그 사람은 잘 살고 있을까, 살아는 있나.

숙소에서 내려다 본 풍경, 창문이 꽁꽁 얼어 열수가 없으니 사진에 방충망의 격자무늬가 그대로 보인다.


지독한 추위로 시작하는 이른 아침이다. 창문이 꽁꽁 얼어붙어 열리지 않는다. 영하 19도의 공기는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여 억지로라도 열어보려 했지만 얼어붙은 창문은 요지부동이다. 사진 속 풍경에 격자무늬(방충망)가 있는 것은 대충 그런 이유다. 이틀 전 난방 장치가 고장 났다. 열 공급이 되지 않아도 잔열이 남아 있어 얼어 죽을 정도로 춥지는 않았지만 이제 하루 정도 더 지나면 이 곳은 시베리아가 될 것이다. 그 예감이 당장의 추위보다 더 불안했다. 먼저 방문한 관리실 직원은 원인을 밝히지 못하고 내려갔다. 그리고 지난밤 교대한 당번 기사는 
이것저것 점검 끝에 원인을 밝혀냈다. 부품을 구하는대로 수리하겠노라 말한다. 예측 가능성이 불안을 덜어준다는 것은 언제나 진리다.


내 소유의 첫 집은 복도식 아파트였다. 겨울이 되면 계량기가 동파돼 철물점으로 그것을 사러 갔던 기억이 새롭다. 세 평을 늘려간 두 번째 집에서도 겨울에 몇 번 계량기가 깨져서 고생했던 적이 있다. 추위는, 대충 옷을 챙겨 입고 철물점을 찾아 계량기를 사러 종종걸음을 옮기던 그 느낌을 소환한다. 갑자기 찾아온 추위에 철물점마다 계량기 재고가 떨어져 다른 곳으로 발길을 옮기던 때의 그 실망스러운 느낌도 딸려온다. 평소엔 잠재돼 있다가 추운 날이면 그때 기억들이 하나하나 떠 오른다.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어느 해 겨울, 세상과 결별했던 아버지의 장례식을 기억한다. 2박 3일 전통 장례였다. 바닷바람은 목덜미를 파고드는데 검정 교복에 삼베로 짠 상복을 입고 대나무 지팡이를 들고 상여를 따랐다. 상여를 인도했던 친구의 아버지는 '이제 가면 언제 오나~'로 시작하는 메김을 넣으면 상여꾼들은 '에여 디여~' 하면서 맞받았다. 내게는 '훠이 훠이' 같은 의성어로만 들리던 이 구슬픈 노래는 람결에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때 흘린 눈물은 슬픔이 아닌 매서운 바람 때문이었다. 그런 방식으로 추위는 기억 속에 불편한 흔적을 남겼다.


대학에  들어가 맞은 두 번째 겨울에 만난 사람이 있었다. 나도 그 사람도 방황하던 시절이었다. 둘은 한 커피숍에서 음악을 틀고 밥과 숙소와  약간의 용돈을 받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나보다 두 살이  많았던 그 사람은 무엇이 그리도 괴로운지 세상을 원망하며 옥상에 올라가 소주를 마시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OO야 열심히 살자' 그런 다음에 먹은 것을 다 토해내고 잠이 들곤 했다. 그리고 음악을 틀 때면 밥 딜런이나 피터 폴 앤 매리, 닐 영 같은 처연하게  외로움이 묻어나는 곡들을 선곡하고 자기 연민에 빠져 허덕였다. 옆에서 그것을 구경하는 것 자체가 힘들 정도였다. 난 그 사람에게서  습관적 자기 연민을 배웠다. 지금도 추운 날이면 그 사람이 생각난다. 잘 살고  있을까. 살아는 있나.


닥터 지바고 같은 영화는 극단적인 추위와 켜켜이 쌓인 눈을 묘사한다. 난 그런 영화를 볼 때 실제로  춥다. 언젠가부터  부쩍 추위를 더 타는 체질상의 변화도 있겠지만 아무튼 난 추위에 약하다. 창문을 열고 환기시키는 시간을 몹시 길게 느낀다.  며칠 째 영하 십몇 도까지 내려가는 한파가 이어진다. 나보다 훨씬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추위에 떨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나아가 내 이런 인식이 그들에게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많은 사람들의 실존이 추위에 속살을 드러내고 고통스러워한다. 모진 한파는 감염병의 장기화와 붙어 증폭한다. 모든 고통을 인간이 초래했다고 믿기엔 현실이 너무 가혹하다. 날이 춥다고 별 이야기를 다 했다. 갑작스레 주어진 짧은 여유가 기억을 불렀다. 그나저나 그 사람은 잘 살고 있을까. 살아는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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