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실밖 Oct 18. 2024

나는 네가 여기서 한 일을 알고 있다(5, 최종)

복도로 나오는 순간 짙은 사탕 냄새가 났다

  올 초부터 시작된 감염병의 유행은 교실 풍경을 바꾸어 놓았다. 교사들은 화상회의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실시간 쌍방향 수업을 해야 했다. 아이들은 학교에 나오지 않아 빈 교실일 때가 많았다. 교사들은 교탁에 노트북 컴퓨터와 카메라를 설치하고 원격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화면 속에서 아이들은 선생님께 인사도 하고 발표도 하였다. 모니터 속 아이들 얼굴 뒤로 집안의 풍경이 드러났다. 때로 다른 가족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스물 몇 명의 아이들은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그러나 대체로 귀찮은 얼굴로 화면 속에서 제각각 움직였다. 사고 능력은 없지만 쉴새 없이 꼬물거리는 생명체였다. 지금까지는 경험해보지 못한 풍경이었다.

  오십 후반에 들어선 홍 선생은 젊은 교사에게 간신히 온라인 수업 프로그램을 작동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러나 막상 그렇게 수업을 진행하자니 서툰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결국 홍 선생은 처음 시작할 때만 실시간으로 아이들과 인사를 했고, 곧바로 과제를 제시했다. 아이들이 주말까지만 과제를 제출하면 출석으로 인정을 해주는 것이 나쁘진 않았다.


  홍 선생은 아이들이 집에서 공부를 하고 있나 알아볼 수 없어 답답했지만 이 방법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지금은 감염병이 유행하고 있어 어차피 아이들을 볼 수 없지 않은가. 이렇게라도 수업이 이어지면 그나마 다행 아닌가 말이지. 오히려 과제물 제시만 잘하면 전부를 실시간 쌍방향으로 하는 것보다는 물론이고 전통적인 교실수업보다도 편했다. 무엇보다도 교실수업을 할 땐 수업을 노골적으로 방해하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니 좋았다. 홍 선생은 교실에서 아이들을 직접 만나지 않는 것을 내심 다행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홍 선생은 이 원격수업 상황이 길어지길 바라는 듯했다. 그는 교실에 들어오면 서둘러 출석 체크와 과제를 제시하고, 남은 시간엔 책을 읽거나 PC로 정보검색을 했다. 가끔 몸을 돌려 칠판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리곤 했다. “나도 왕년에는 예술적인 판서로 날렸던 사람이야. 괘도를 만드는 솜씨도 좋아서 수업자료 전시회에 나갔었지. 정말 시대가 바뀌어 나 같은 사람은 쓸모가 없어진 것인가.” 홍 선생은 칠판을 향해 쓸쓸하게 웃었다.


  어느 땐 교사들도 학교에 출근하지 않았다. 삼분의 일씩 돌아가며 재택근무를 한다고 했다. 집에 장비를 마련해 놓고 원격수업을 한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이동수업이 늘어난 데다 전자칠판까지 있어서 나를 사용해 주는 교사가 없는데 재택근무를 한다고 하니 이제 거의 나를 쓰는 교사는 없었다. 지금 내 앞에는 덩치가 큰 전자칠판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전자칠판을 고정할 때 칠판 틀에다 나사못을 박아 고정했다. 내 머리와 허리춤이 몹시 아팠지만 내색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분필의 품질도 좋아져서 먼지도 거의 날리지 않았고 판서 글씨도 또렷했지만 교사들은 손에 분필을 묻히려 하지 않았다. 아주 가끔 분필을 잡는 경우에도 종이로 돌돌 말아 쥐었다. 아니면 ‘물백묵’이라 불리는 필기구를 가지고 다녔다. 내 몸의 전부를 활용해서 예술적으로 판서했던 교사들이 그리웠다. 교사가 판서를 잘하면 학생들은 좋아했고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나는 존재를 한껏 드러냈다.

  어쩌다 한 번씩 교사와 학생들이 교실에서 수업을 했다. 감염병 유행 정도에 따라 밀집도를 조정해야 하기 때문이라 했다. 그럴 때면 교사와 학생들 모두 마스크를 쓰고 학교에 나왔다. 교실은 진풍경이 됐다. 교사는 마스크 안에서 발음하느라 힘들어했고, 아이들도 답답해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교사마다 다른 체취와 숨결을 느낄 수 없었다.

  드물게 분필을 잡는 교사들이 있었으나 내 허리춤에는 더 이상 분필이 없을 때가 많았다. 전자칠판이 들어오고부터 아이들은 분필을 가져다 놓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교사가 “주번은 교무실에 가서 분필 좀 가져오너라.”라고 말했을 것이다. 요즘은 분필이 없다고 해도 주번을 부르지 않았다. 아니 주번이란 제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심부름을 시키지 않았다. 간혹 사소한 부탁을 할 때도 아이들은 "싫은데요?"라고 하거나 “갔다 오면 봉사 시간 인정해 주실 거죠?”라고 예의 없는 말을 했다.

  종종 아이들은 교사에게 대들었다. 자기만 지적했다더니, 무시했다느니 하면서 교사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노골적으로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대며 아동학대로 신고당하고 싶냐고 위협하는 아이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러면서 “왜, 쫄았니?”라고 반말을 해댔다. 그럴 때마다 교사들의 등이 흔들렸다. 몇은 아이들과의 이런 다툼이 싫어 명예퇴직을 했다. 옛날에는 내 앞에서 아이들에게 회초리를 들던 선생들도 무서웠지만, 요즘에는 아이들이 더 무서웠다.

  나는 일주일에 네 번 들어오는 신 선생만 기다렸다. 비록 전에 비해 나를 사용하는 빈도는 줄었지만 그래도 신 선생이 내 앞에 서 있을 땐 마음이 편했다. 특히 가끔 몸을 돌려 칠판을 바라볼 땐 너무 고마웠다. 신 선생도 예외는 아니어서 아이들이 대들 때가 있었다. 노련하게 대처할 때도 있었지만 신 선생도 교단에 회의가 느껴지는 듯했다. 모든 과정을 지켜본 나는 화가 났다. 교실은 기계로 채워지고 아이들은 점점 더 버릇이 없어졌으며, 교사들은 의욕이 떨어져 갔다.


  어느 토요일이었다. 인부 두 명이 교실로 들어왔다. 드디어 나를 떼어 낼 모양이었다. 그들은 흰색으로 된 넓은 판을 가지고 들어왔다. 화이트보드라 불리는 것이었다. 나를 완전히 떼어 낸 다음, 전자칠판을 오른쪽 옆으로 보내고 왼쪽 남는 공간에 화이트보드를 설치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들리는 얘기로는 여러 교사들이 그동안 전자칠판 쓰는 것이 부담스럽고 학습 효과도 떨어진다는 말을 교장에게 하면서 먼지가 날리지 않는 화이트보드를 설치해 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나는 갑자기 닥친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인부들은 전원 코드를 뽑은 다음 조심스럽게 전자칠판을 제거하여 앞자리 아이들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어이, 김 씨, 조심하라구. 이게 얼마짜린지 알아? 파손되면 당신 몇 달 치 월급이 날아간다구.” 전자 칠판에 분리되자 내 몸이 다 드러났다. 오랜만에 공기를 쐬니 기분이 좋았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인부들은 드르륵드르륵 소리가 나게 볼트를 풀어 나를 벽에서 떼어 냈다. 온몸에 불쾌한 전율이 몰려왔다. 시멘트 특유의 거친 냄새가 훅 들어왔다. 인부들에 들려 복도로 나가니 이미 많은 교실에서 친구들이 뜯겨 나와 있었다. 탁한 공기가 가득한 복도엔 20년 이상 교실 벽에 매달려 있었던 친구들이 다시 모였다.

  이제 나는 산업폐기물이 되거나, 인근에 있는 열병합발전소의 땔감으로 쓰일 것이다. 쓰임이 다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온몸에 통증이 왔다. 신 선생, 윤 선생을 비롯해서 내 몸에 자주 낙서를 했던 지훈이와 예술적으로 판서하던 사회 선생 얼굴이 차례로 지나갔다. 복도로 나오는 순간 짙은 사탕 냄새가 났다. 나는 그 냄새를 조금이라도 더 맡아보고 싶었으나 곧 계단을 거쳐 운동장에 대기하고 있던 트럭에 실려졌다. 나와 함께 이 학교에 왔던 여러 동료 칠판과 함께였다. 트럭에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매캐한 연료 냄새가 짐칸으로 올라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네가 여기서 한 일을 알고 있다.



작가의 말

20년 이상 중학교 교실 벽에 매달려 있었던 어느 칠판이 보고 듣고 느낀 이야기였다. 우스개로 '무생물 독백 시점'이라 했으나 최종화를 쓰고 보니 후회가 크다. 애초 칠판의 시선에서 본 교실의 다양한 풍경을 창작의 형식을 빌려 담아내고 싶었지만 역부족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만약 서책으로 출판할 수 있다면 소설적 장치와 서술을 더 보완하려 한다. 꼼꼼하게 읽어주는 독자들은 언제나 나에게 힘을 준다.



새로운 에피소드 소라의 겨울(1)

https://brunch.co.kr/@webtutor/865


이전 14화 나는 네가 여기서 한 일을 알고 있다(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