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도 포기와 양보에 익숙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내가 아닐까 싶다. 지금이야 거절하는 게 어렵지 않지만, 예전의 나는 거절하는 게 늘 부담스러웠다. 그게 뭐라고 싶은 일이지만, 그게 그렇게 단순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늘 '어쭙잖은 예스맨'이었다. 사실은 싫지만 다 숨기고 알았어, 그래, 좋아. '어쭙잖은 예스맨'.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말은 없다.
소소한 양보는 참 아름다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자리 양보, 순서 바꿔주는 정도의 것. 그 정도야 아름답다. 하지만 소소한 것이 사소해진다면 딱히 아름답지만은 않다. 나는 사소하다 생각한 것이, 사실은 사소하지 않을 수 있다는 문제.
내게 있어 사소하다 생각했던 포기는 대학교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학과'. 합격과 불합격에 극도로 긴장하던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나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던 나는, 원했던 학과에 합격했으면서도 포기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쌍둥이니까, 사립대니까. 참으로 어쭙잖은 이유였다. 그렇게 포기하면서 바라마지 않았던 꿈을 같이 포기했던 거였다.
새벽 어스름에 나는 내 마음을 알았다. 나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내 자리를 양보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 모든 일을 털어놓는 순간이 되어서야 알았다. 나는 간절했었고, 그때 숨죽이고 있던 나는 처절했다. 지금은 후회한다. 후회하고 있지 않냐는 물음에 그렇지 않다고 했지만, 사실은 후회한다.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는 것은 중요치 않다. 남부럽지 않게 좋은 성적도 중요치 않다. 사소하다고 생각한 포기로 무너진 과거의 모든 순간이 중요한 게 아닐까.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떨까 생각하면,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란 걸 알기 때문에.
포기와 양보, 아름답지만은 않다
'양보의 미덕'과 같은 말이 좋은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양보, 좋은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 상황을 보는 입장에서야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양보가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수많은 고민과 결정의 순간에 쉽게 포기하고 양보하지 않았으면 한다. 괜찮다고 생각한 결정이 후에 보면 최선이 아닌 최악일 수 있다. 그러니 나를 위해 나는 가장 이기적이어야 한다. 나를 위한 선택의 순간, 그 순간만큼은 이기적인 것이 최선이다.
그게 뭐냐는 질타를 받아도 좋다. 비난은 어느 순간 사라지지만, 후회는 계속해서 곱씹게 된다. '그때 그랬었지' 하는 추억이 아니다. '그때 내가 왜 그랬지' 하는 나를 향한 비난과 후회. 그때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좀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니 나를 위해 이기주의자가 되어도 좋다. 그때 포기했다면 지금 다시 하겠다고 마음 먹어도 좋다. 그랬으면 어떨까 하는 미련보다는 직접 겪는 것이 차라리 나은 법이다.
그러니, '나를 위해' 이기주의자가 되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