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 둘 엄마가 Before Sunrise & Sunset을 읽으면
Before Sunrise & Before Sunset은 나에게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 영화들이다. 물론 나에겐 영화보다 대본집이 더 의미가 있다. 영화는 Before Midnight까지 각각 한두 번 봤지만 대본집은 닳도록 읽었다.
2015년, 둘째 아이를 낳고 아이를 봐주실 이모님이 생기게 된 이후 나는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점에서 원서를 뒤적거리던 차에 집어 들었던 책이 이 책이었다. 서서 대본집을 쓱 훑는데 이 책이라면 영어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이라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모두 이 영화를 보면서 큰 사람들이니까. 뭐에 홀린 사람처럼 이 책으로 오프라인 북클럽 모집을 했고 진짜 그렇게 시작하게 되었다.
이 시작을 위해 전단지를 붙였던 비하인드 스토리는 이전에도 했으니 넘어가도록 한다.
많은 분들은 비포 선라이즈 영화를 떠올리면 '로맨스'가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보다도 '대화'가 떠오른다.
남녀를 떠나 성인 두 명이 나누는 깊은 대화들. 그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작년에 북클럽 할 때도 멤버님들과 그런 이야기를 하긴 했다. 이게 20대 때 할 수 있는 대화냐고.
20대를 훌쩍 넘긴 우리들에겐 그런 부분이 참 놀라웠다. 우리의 20대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고 그 생각을 솔직히 표현했는가?
제시와 셀린은 정치와 환경, 교육, 부모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조곤조곤 이야기했고 서로 전혀 다른 의견을 보일 땐 '응 그렇구나' 정도로 받아들이고 또 자신의 이야기로 대화를 켜켜이 쌓아갔다. 동서양의 차이인 건가 아니면 그냥 개인의 차이인 건가.
과거 20대의 내가 되어 남자와 저렇게 하루 종일 대화를 해야 한다면 상대, 특히 내가 잘 보이고 싶은 이성이라면, 내 생각과 의견은 뒤로하고 '맞아 맞아' 하면서 물개 박수를 치는 공감의 아이콘이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인식했을지가 의문이다. 내가 무언가에 대해 제대로 생각하고 그것을 표현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제시가 'why does everyeone think conflict is so bad?' (왜 우리 모두는 갈등이 굉장히 나쁜 거라고 생각해?)라고 했다면 아마 나는 '응?' '뭐라고?' 했을 것 같다. '도대체 얘 무슨 얘기하는 거야...' 우리는 당시 이런 개념적인 질문을 하는 사람을 4차원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나이든 성인이라도 깊은 대화가 안 되는 사람들이 많다. 일상생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순 있다. 그러나 상대가 생각을 해야지 답할 수 있는 질문을 물으면 아주 표면적인 대화를 하거나 아니면 아예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가족 이야기로 넘어가고 학원 이야기로, 최악의 경우엔 연예인 이야기로... 누가 그러더라 연예인 이야기 나온 순간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는 거라고. 깊은 생각의 공유를 통해 점점 가지 치는 폭넓은 대화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셀린과 제시의 끝도 없이 진행되는 대화가 너무 아름답고 부러웠다. 그 대화를 오스트리아 빈과 파리에서 걸으면서 나누다니...
내가 다시 20살로 돌아간다면 문학을 더 많이 읽고 싶다. 일을 해야 한다는 죄책감, 아이를 보고 집안을 돌봐야 한다는 죄책감 없이 마음 편히 읽고 싶다. 그렇게 읽고 나서 글을 쓰고 그 책들을 읽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생각 없이 많이 걷고 싶다. 배낭여행도 하고 싶다. 딴짓을 많이 해보고 싶다. 이렇게 쓰고 나니 이건 내가 꼭 20살로 돌아가야 가능한 일은 아니구나 해서 안심이 되기도 하다.
근데 20살로 돌아가야 할 수 있는 건 아닌데 분명 지금 내가 하는 것과 20대의 내가 하는 것엔 큰 차이가 있다. 북클럽에서 한 멤버님이 말씀하신 대로 나는 버석해져 버렸다. 버석하다는 단어는 진짜 존재하는 단어이다. '부스러지기 쉬울 정도로 물기가 없어 부숭부숭하다.' 그래서 지금 비포 선라이즈에서 20대의 셀린과 제시의 하룻밤의 대화를 영화로나 대본집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크나큰 선물과 같다. 왜냐면 그들도 비포 선셋에서는 나와 같이 버석해지고 비포 미드나잇은 더 하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냥 물기를 촉촉하게 머금고 뭘 모른 채 좀 이쁜척하고 똑똑한 척하던 20대의 젊음이 그 자체로 대체 불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