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9살 남자아이들이 그러듯이 올해 9살인 아들은 장난꾸러기다.
유튜브에서 본 과학 실험 영상을 따라 하다 온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기도 하고, 씻기기 위해 옷을 벗겨 놓으면 벌거숭이 상태로 온 집안을 뛰어다니며 엄마를 발견하면 그 앞에서 눈꼴사납게 (?) 전라의 상태에서 제로투 댄스를 추기도 한다. 아들이 집에서 그리고 밖에서 하는 온갖 장난들을 나열하면 아마도 여백 없이 A4용지 10장을 채울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아들에게 무조건 "오냐, 오냐. 우리 아들 잘했어."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짜증이나 화를 잘 내지 않는 편이다. 원래 화를 잘 내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내가 그랬듯 이 아이도 좀 더 크면 아빠라는 존재와의 관계는 점점 멀어질 것인데, 아이의 기억 속에 내가 "무서운 아빠"로 기억 남고 싶지 않은 이유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제 오랜만에 아들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말았다.
어제 아내가 늦게까지 일이 있어 오랜만에 아이의 숙제와 구몬을 옆에서 봐주기로 했는데, 그전까지 쌩쌩하게 뛰어놀기도 하고 뒹굴거리며 핸드폰 게임을 하던 아이가 숙제하자는 말에 갑자기 "아빠, 오늘 너무 피곤한데, 내일 하면 안 돼?"라고 물었다.
물론 평소의 나 같으면 "그래 내일 하자!" 했겠지만, 외출하는 아내가 내일 학교에 제출해야 되는 숙제도 있고, 구몬 같은 경우 하루가 밀리면 다음날 몰아서 시킬 때 아이가 힘들어하니 반드시 옆에서 하는 것을 지켜보며 오늘 모든 과목을 끝내라고 신신당부를 했기에 아이에게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책상으로 와서 앉으라고 했다.
거의 죽을상을 하며 마지못해 책상에 앉는 아들의 모습을 보니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가기 싫은 표정으로 주간 회의에 들어가는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학교 숙제는 받아쓰기였는데, 시작하기 전 아들은 '이 연필로는 쓰기 싫다. 아빠 나 물 좀 먹고 올게. 아빠 간식 먹으면서 하면 안 돼?. 아빠 나 화장실 다녀올게.' 등 정말 공부가 하기 싫다는 것을 온몸으로 간절히 표현하고 있었다.
결국 아이가 공부하기 전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고 나니 20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아들과 받아쓰기를 시작하는데 아들이 쓰는 글씨는 삐뚤삐뚤하고 한글이라 볼 수 없는 혼자만의 암호 같은 상형문자를 적어내고 있었다.
"**아, 글씨 좀 제대로 써야지. 글씨는 너도 보는 거지만, 다른 사람한테도 보여주려고 쓰는 건데."라고 아이에게 말했을 때 아이는 짜증을 내며 "아빠, 나도 열심히 쓰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 써도 선생님은 다 알아보신단 말이야."라고 대꾸했다. 아들의 그 말을 듣고 내가 생각해도 '꼰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는 아들에게 왜 글씨를 잘 써야 하는지 타일렀고, 내 말을 모두 들은 아들은 "알았어. 알았다고." 라며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니 이제 9살 아이가 아빠에게 한숨 쉬고 내게 짜증을 내며 버릇없이 말하다니 나도 화가 나기 시작했다.
"너 지금 아빠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지금 뭐라고 했어?"
"나는 노력해서 열심히 쓰고 있는데, 계속 글씨 못 쓴다고 뭐라고 하잖아. 아빠는 어른이라 글씨 잘 쓰는 거고, 아이인 나랑 같아?" 아이는 이렇게 말하며 노트를 밀고 책상에 연필을 "탁"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거의 던지듯이 놓았다.
내가 화를 내며 말했을 때 겁을 먹고 바로 잘못했다고 할 것이라 생각했던 아이가 반박을 하니 오히려 당황한 것은 나였다. 하지만 아이의 언행과 태도는 분명 문제가 있다 생각이 들어 아이에게 잔소리를 했고, 그동안 공부와 말투와 태도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아빠의 잔소리에 아이는 풀이 죽어 숙제와 구몬을 했다. 평소 같으면 문제 하나 풀고 낙서를 하든지 내게 장난을 치던 아이였는데, 마치 '내가 오늘 기분이 안 좋아' 라며 보여주는 것 같았다.
숙제를 마친 뒤 아이는 자기 방에서 문을 닫고 혼자 있고, 나는 거실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내가 너무 아이를 다그친 게 아닐까, 그깟 숙제가 뭐라고 내가 말을 심하게 했나. 그래도 저 녀석 아빠 앞에서 감히 짜증을 내고 연필을 던져? 머릿속에서 미안함과 아들에 대한 서운한 감정이 오갔다.
그리고 내가 아들만 했을 때 나의 모습을 생각했다.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도 나처럼 내게 화를 내신 적도 없고 잔소리하신 적도 없었다. 장난꾸러기 야구광이던 내가 다른 집의 비싼 유리창을 박살내고 온 날도 아버지께서는 "그 집이 이 동네에서 가장 튼튼한 유리창이라고 소문난 집인데, 어른도 쉽게 못 깨는 그 집 유리창을 공으로 던져서 박살 내다니 우리 아들 힘 좋네! 나중에 투수하면 되겠다!" 라며 혼내지 않으시며 부족한 살림에 변상해주신 적도 있었고, 시험 볼 때 친구와 답안지에 장난을 쳐 20점을 받았을 때도 "와! 아빠는 시험 볼 때 장난쳤으면 0점이었을 텐데, 20점이나 받아오고 우리 아들이 기본 실력은 있구나. 장난치지 않고 시험 봤으면 100점 맞았겠어. 다음에는 장난치지 말고 제대로 한 번 시험 봐봐."라고 하셨다. 물론 어머니께서는 그런 아버지 옆에서 '이 자식을 빗자루로 팰까 다듬이 방망이로 팰까' 선택의 시간을 가지고 계셨지만..
생각해보니 아버지께서는 내가 심한 장난을 치든, 공부를 못하든, 잘못을 해도 항상 칭찬을 섞어서 말씀하셨다. 아이에게 경제적으로 아버지보다 내가 좋은 아버지일지는 몰라도 아이를 이해하는 아버지로서는 아버지보다 내가 아직 많은 것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때 방에 조용히 있던 아들이 거실에 혼자 앉아 있는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빠, 아까 내가 말을 나쁘게 해서 미안해. 아니 죄송해요. 그런데 아빠 내가 지금 손가락이 아파. 여기 살갗 벗겨진 거 보이지? 그래서 연필을 꽉 못 잡어. 다음에 아빠랑 할 때는 좀 더 잘 쓸게. 화 풀어."
내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아들은 아직도 내가 화가 풀리지 않은 거라 생각한 것 같았다.
아들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뒤 "아빠 화 아까 다 풀렸어. 아빠도 **한 테 화를 낸 게 미안해서 어떻게 말하면 우리 **이 기분이 좀 좋아질까 생각하고 있었어. 아빠도 미안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철이 든 아들의 모습이 대견했다. 그리고 올바른 어린이로 자라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아들은 내게 할 말이 있다며 귓속말로 하겠다고 한다. 내심 "아빠, 사랑해요."라는 말을 듣기를 기대했는데, "아빠, 내 방 책상 밑에 게임하다가 발로 차서 우유 엎질렀거든. 닦아줘." 그리고 후다닥 큰 방으로 줄행랑을 쳤다.
아오... 저 놈을 어떻게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