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가락 골절로 캠핑을 다니지 못한 지 벌써 한 달째입니다. 혹한에도 폭염에도 캠핑을 쉬지 않았던 제가 이렇게 캠핑을 오랜 기간 정지한 것은 캠핑을 시작한 이후로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캠핑을 가지 못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다리를 절뚝거리며 집안, 그리고 트렁크에 가득 실린 캠핑 장비들을 주말에 정리했습니다.
평소 건강할 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캠핑 장비 하나하나의 사연이 떠오르고 그래도 이 장비들 덕분에 내가 즐거운 추억을 많이 쌓았다고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도 들더군요.
낑낑거리며 팬히터를 들고 와 정성스럽게 잔유도 빼고 청소하고 있는데, 와이프가 제게 "오빠는 그런데 캠핑을 왜 시작했어?"라고 묻습니다.
사실 저는 시간제한 없이 공기 좋은 곳에서 술 마시는 게 좋아 캠핑을 시작했습니다. 평소 신데렐라처럼 12시가 되기 전 집에 반드시 가야 했지만 캠핑장에서는 와이프와 아이가 잠들면 조용히 의자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혼자 술 마시는 시간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캠핑을 다니는 이유가 혼술의 시간보다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으로 바뀌었습니다.
술을 마시는 시간보다 아이가 캠핑장에서 다른 아이들과 뛰어노는 모습, 함께 물고기를 잡거나 물놀이를 하고 그동안 나누지 못한 여러 이야기들 (주로 아들은 게임이야기만 합니다.) 나누는 시간이 이제 더 소중해졌습니다.
이제 확실히 저보다 캠핑을 더 좋아하게 된 아이는 아빠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캠핑을 다니지 못하는 것을 알기에 짜증은 내지 못하지만, 토요일 아침 같이 "텐트 밖은 유럽"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지난겨울 캠핑 추억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아~ 나도 캠핑 가고 싶다. 캠핑 가기 딱 좋은 날씨인데..." 하며 한숨을 쉽니다.
"인마.. 33도 폭염이야.. 넌 캠핑장 도착하면 물에 풍덩이지만. 아빠는 바지적삼 땀으로 적시며..."라고 하고 싶지만, 티브이를 멍하니 보는 아이를 보니 차마 그 말은 못 하고 "아빠가 다리를 다쳐 캠핑을 다니지 못해 미. 안. 하. 다. 유. 감. 이. 네."라고 할 뿐입니다.
저는 아이 학교, 학원 친구 아빠들 사이에서 '공공의 적'입니다. 저희 아이는 매주 수요일이 되면 학교와 학원에서 "나는 이번 주에 아빠랑 캠핑 간다!"라고 아이들은 물론 선생님들에게 자랑하고 아이의 친구들은 그런 저희 아이를 부러워한다고 합니다. 아주 가끔은 아이 친구들을 데리고 함께 캠핑을 가 솔선수범 몸고생을 하기도 하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 아이의 "아빠 이번 캠핑 너무 재밌었어. 다음에 또 가자!"라는 한 마디면 모든 피곤이 사라지기는커녕 삭신이 쑤십니다. 그래도 마음은 행복해집니다.
거의 매주 아이가 캠핑 간다고 자랑을 하니 학원 선생님께서 "그런데 아버지는 어떤 일 하시니?"라고 아이에게 물어봐서 아이는 당당하게 "사무직이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이가 제게 "그런데 아빠는 무슨 일을 해?"라고 물었을 때 제가 "응 아빠는 사무직이야."라고 한 적이 있는데 지금도 이 아이는 제가 사무직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은 한동안 아이가 캠핑 간다는 자랑을 하지 않았더니 주변 사람들이 "왜 이번 주는 캠핑을 안 가니?"라고 묻는 덕분에 제가 다쳤다는 것을 아이 학교, 학원의 모든 관계자가 다 알게 되었습니다. 소문이 참 무섭다고 저는 발가락 골절을 당한 건데 거의 한쪽 다리를 잘라야 할 정도의 큰 부상을 당한 것처럼 소문이 났더라고요.. 허허허...
덕분에 아이의 친구들도 저를 보면 아저씨는 사무직이라면서요?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연히 다른 학부모님들을 만나면 그분들은 제게 "어떻게 매주 아이와 캠핑을 다니세요. 정말 좋은 아빠네요."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저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사실 좋은 아빠가 아닙니다. 평일에 술 마시다 늦게 들어오는 날도 많고, 게임하는 아이에게 잔소리도 하고, 가끔은 대드는 아이에게 남자 대 남자로 붙자! 이러며 결투를 신청하기도 하는 많이 모자란 아빠인데, 단지 주말이라는 시간에 아이를 데리고 (사실 주말에 집에서 핸드폰 들고 게임하고 유튜브 보는 꼴을 보기 싫어 아들을 캠핑장으로 모시고 다니는 것입니다....) 아이의 시선과 관심에 맞춰 졸졸 따라다녀 주고 하는 말을 다 들어주는 것뿐인데요.
얼마 전 조영진 교수라는 분이 쓴 <아빠 반성문>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제목을 보고 아빠 반성문? 아빠가 무슨 죄인이야? 하는 마음으로 읽었는데, 다행히 그런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런 내용이었다면 넷플릭스 보며 뒹굴거리는 제게 한 번 읽어보라고 책을 던져줬던 와이프에게 "너는 푸틴이고 난 바그너 그룹의 프리고진이다."라며 가내 독재자를 향해 쿠데타를 선언했을 겁니다.
아무튼 책의 모든 내용이 다 기억에 남지는 않지만 "좋은 아빠 말고 그냥 아빠면 충분하다"는 문장이 기억에 남습니다.
저보다 캠핑을 더 좋아하고, 제가 캠핑 카페의 글을 볼 때 옆에서 "아빠 그런데 이 텐트는 이름이 뭐야? 우리도 사자"라고 옆에서 뽐뿌질을 오지게 하는(아들 눈에 들어오는 텐트는 항상 크고 비싼 텐트입니다.) 캠핑 꿈나무 아들에게 캠핑 좋아하는 '그냥 아빠'가 되어줘야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