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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원 Nov 07. 2021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산을 오른다

도봉산 신선대 2021년 10월 30일 토요일

산확행(산에서 느끼는 확실한 행복) 멤버는 낙오경, 휘발유와 나 3명이다.

올해 초 퇴사는 질렀고 에너지는 남아돌았고 별다른 성취는 없는 헛헛함에 간간이 이 멤버와 산에 올랐다.

이직을 한 뒤에도 관성이 붙어 계속 등산을 한다.

이번 산행부터 질투와 경쟁심리를 원동력으로 삼는 송이도 합류해 넷이 되었다.


도봉산 신선대에 오르기로 약속한 날 하루 전

단톡방에 요즘 20대들이 인스타그램 때문인지 코로나로 헬스장을 다들 못 갔기 때문인지 등산에 맛들려 있어 100대 명산으로 꼽히기라도 하면 산 정상에 올라도 출근길 홍대 입구처럼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리고 일찌감치 올라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마음 같아서는 해뜨기 전 움직이고 싶었으나 아침잠 많은 멤버들을 조금 고려해서 7시까지 집합하기로 했다.


밤새 카톡이 울린다.

-나 지금 눕는다 (9시)

-와... 나 아직도 못 잠 (10시)

-와 제발 네가 나보다 늦게 자게 되길 (11시)

-낼 새벽에 우리 엄마한테 전화해라 그냥. 우리 엄마 번호 >> 010-63**-0000

이런 대화들이 계속 오가고


-나는 네 시간 잤어

-나는 두 시간 잤어

하며 파리한 얼굴들로 아침에 모였다.

후훗 귀여운 것들... 전날 깊은 수면을 누리고 온 나는 속으로 한번 웃어준다.

웃음이 무색하게 등산을 시작하고 가장 잠을 많이 자고 나온 나는 처음부터 쳐지기 시작한다.

무슨 잠을 두세 시간 자고 왔다는 애들이 산을 껑충껑충 뛰어올라가는지

등산 스틱을 쥔 나는 애들의 뒤통수만 쳐다보면서 올라간다.


아 맞다.

생각해 보니 쟤네는 나보다 10살 정도가 어렸다.

그냥 친구처럼 지내서 나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젊었구나.

나도 매주 등산을 하고 나름 주중에 훈련(?)도 하는데 헬스와 필라테스 젊음으로 다져진 20대들의 몸놀림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이 싫었다.

힘들다. 배고프다. 만 생각하며 했던 산행에서,

나는 도대체 나이를 언제 이렇게 먹었나.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나. 지금 죽어도 호상인가. 이런 생각까지 하면서 도봉산과 함께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산도 함께 오른다.


10월 마지막 주 주말

신선대에 가까워질수록 단풍이 짙어진다.

낙엽의 색상을 보고 감탄하는 것도 나이 탓인가 혼자 생각하다가.

단체사진을 찍는다.

사진을 찍고 모습을 확인해 보니 나만 뚱뚱하다.

이것들이 요즘 단체로 다이어트를 하더니...

인생의 즐거움을 먹는 것과 등산으로 채우는 나는 다이어트 열풍 속에 벼락 돼지가 되어버렸다.

다시 또 상대적 박탈감 산을 오른다.


점점 고도가 올라가며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발은 부어오르는지 등산화가 점점 작아지는 느낌이다.

그러면서 생각은 다시 단순해진다. 정상에 올라가야지. 그리고 다시 내려와야지.

이런 단순한 생각을 하며 일주일 동안 회의하며 언성을 올린 일, 건설사 직원들과 소주를 마시며 회식했던 일, 반복해서 들었던 말, 했던 말, 감사, 아부, 사과, 짜증, 돈 벌기의 치사함과 구차함 이런 것들이 잠시나마 휘발된다.

24시간 뒤 없어지는 인스타그램의 스토리처럼.

산에서 찍은 사진들도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린다. 이것도 휘발되겠지


신선대에 다다라서는 절정이다.

고소공포증이 있어 다리가 풀려 주저앉은 낙오경을 보고 있자니 나도 같이 주저앉고 싶지만 등산객도 많고 뒤에서 밀려오는 사람이 있다 보니 얼떨결에 올라간다.

'신선대 정상'이라고 쓰여있는 푯말 하나 붙잡고 인증샷을 찍는다.

하나 해냈구나, 4시간의 성취, 일상에서 이룰 수 있는 짧고 자주 이룰 수 있는 성취다.

몇 년 전에는 마당바위까지도 힘들었는데 나의 양말 속에 숨어있는 발목 보호대와 발가락 보호대, 등산 스틱에 이 영광을 돌린다.


내려오는 길

마당바위와 신선대의 중간쯤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포기할까 말까를 생각하면서 조용하게 쉬는 공간이 있다.

동네 뒷산인 줄 알고 왔다가 도봉산의 기세에 당황한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잠시 쉬었다.

뚱뚱한 고양이가 한 마리 있다.

아니다.

두 마리... 세 마리…

사람들처럼 고양이도 계속 몰려든다.

내 가방에는 편의점에서 2+1으로 산 맥스봉 소시지 3개가 있다.

고양이 러버인 휘발유 낙오경 송이에게 고양들과 눠먹으라고 맥스봉 소시지를   건네 주었다.

나는 한 개를 다 먹어야 되니까.

그런데 고양이 몫으로 넘어가는 소시지가 별로 없었다.

다들 힘들긴 했구나.


생각해보니 등산에서 찍은 사진들과 생각한 것들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리지만 다 휘발되지 않는다.

하이라이트에 저장하기 때문이지.

(나의 가슴속에 저장하기 때문 - 이라고 쓰고 싶었지만 오바다.)


나의 이런 멋진사진은 안올릴수가 없군
휘발유가 집에서 오징어게임 스타일 달고나를 만들어와서 정상까지 핥으면서 올라갔다
신선대 옆에있는 봉우리인데 잘못쌓은 젠가 같다. 누가 하나만 더올리면 와르르멘션
무서워서 앉아있는 낙오경, 정상석이 없어 아쉬운 신선대
등산은 즐겁고
단풍은 아름답고
두부김치는 취하고
집에가는길은 항상 기절
이전 05화 큰형의 어깨를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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