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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원 Dec 18. 2022

알고 보면 세상 무해한 안내산악회

좋은사람들 안내산악회 - 영남알프스 가지산

지난 9월 울산이라는 곳에 처음 가보았다. 나이 40살에 처음 가본 도시이니 아무래도 이 도시를 방문하는 주기는 40년, 그렇다면 80세에나 또 오겠군! 싶었는데 두 달 만에 울산에 또 갔다.

영남알프스 9봉 중 하나인 가지산에 가고 싶은데 SRT왕복은 십만 원이 넘었고, 울산까지 운전 후 등산은 너무 가혹해서 이용하게 된 것은 네이버에 안내산악회를 검색하면 최상단에 나오는 좋은사람들 안내산악회 였다.

*안내 산악회는 전세버스를 채울 수 있는 인원을 모아서 산행 시작점까지 버스를 운행해 주고 하산하는 지점에서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되는 일회성 단체여행 모임이다

나의 상상 속 안내산악회는 어르신들 사이에 끼여서 오가는 버스 안에서 단단히 훈수를 듣거나 고인물들의 텃세를 겪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나 여러 후기를 보아하니 조용히 각자 제갈길 가는 모임이라며, 그저 버스만 같이 탄다는 것이 정설이라는 것을 사전 습득하고 예약하게 되었다.


한 달 전에 예약해둔 안내산악회는 하필이면 월드컵 포르투갈전 다음날이었다. 문 앞에 배낭을 부려놓고 알람을 십이 중, 삼중으로 맞춘 뒤 월드컵 포르투갈전까지 외면하는 지독함을 보이며 잠에 들었다. 막상 새벽같이 일어나 버스를 타고나니, 버스에서 무려 4시간이나 잘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축구 볼걸)


해도 뜨지 않은 12월 첫째 주 새벽 6시 50분 사당역 1번 출구에는 내가 타려는 버스 외에도 등산복을 입은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버스에 오르고 있었다. 안내산악회의 매력은 뜻밖의 것에서 발견되었는데 집단 수면의 베테랑들, 눈가리개, 목베개, 이어폰 등 다양한 아이템으로 고도의 수면력(?)을 선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음 나 역시 수면부족의 직장인이라 이동수단에 몸이 실리면 금세 머리를 꾸벅이며 잠이 들곤 하는데 이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깊은 잠보다는 등산의 준비만 많이 해와서 별 도리없이 목이 옆으로 꺾인 채 잠을 잤기 때문이다. 조명을 다 꺼버린 버스는 칠곡휴게소에 도착해서 불을 켜고 20분 안에 버스로 돌아오라고 했다. 뜻밖의 해방감을 느끼며 우리는 버스에서부터 휴게소까지 달렸다. 이것저것 눈에 들어오는데 나의 선택은 어묵과 어묵 국물로 탄수화물 보충과 몸의 체온을 올렸다.


다시 버스에 올라 잠을 자려고 하니 설렘에 잠이 오지 않는다. 다시 조명은 꺼지고 단호한 집단 수면 베테랑들은 다시 잠을 청하고 모두 합쳐 사당에서부터 4시간을 달려온 버스는 가지산 들머리에 등산객들을 토해냈다. 생각할수록 이렇게 합리적일 수가 없다. 기사님은 4시간 운전을 하는 동안 우리는 쉬고 우리가 등산을 하는 동안 버스기사님이 쉬고 교대로 운전-휴식-등산을 하며 정시에 맞춰 돌아가는 모양새가 말이다.


가지산 초반의 오르막길은 생각보다 거칠었다. 전날 축구보고 날 샌 자, 술 먹은 자, 그냥 나이 든 자(나) 모두 체력을 끌어올려 산을 오르는 기계로 몸을 만들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안내산악회 첫 경험자들의 모임이라 가지산 - 운문산 연계 종주산행에서 운문산을 살짝 빼고 운문산 아랫재라는 곳을 찍고 내려가는 소인배 코스로 수정해서 그나마 경관을 즐기며 사진이라도 몇 장 즐겼지 아마 전체 코스를 주파하려 했으면 서로가 서로에게 원수로 남았을 것이다. 등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보다는 경관을 즐기는 것이라고 글을 쓴 적이 있다면 이날의 나의 등산은 컴피티션...이었다고 말해두고 싶다. 등산을 1년에 한 번 정도 하지만 산지를 평지처럼 날아다니는 축구보고 날 샌 자를 시골 출신들은 역시 달라하며 헬스장 출신들(술먹은자, 나이든자)끼리 소소한 질투를 이어갔으며 뒤에서 우리를 발견하고는 어 우리 버스에서 우리가 꼴찌 아니구먼! 하는 아주머니 두 분에게 제침 당하지 않으려고 스피드를 내려고 기를 쓰다 등산스틱이 부러져버림;;;

정상에 가지 산장에서 라면도 먹었고 가지의 매끈한 이미지와는 전혀 관계 없는 까칠한 암석으로 뒤덮인 가지산 정상에서 현실에서 갑자기 삭제되고 생소한 광경으로 나를 데려다 놓은 경험은 200점을 주고 싶다.


지난 11월 마지막 주에는 혼산을 했었다. 아무와도 생각을 공유하지 않고 발밑만 바라보며 오리엔트 특급 살인 오디오북에 심취해있다가 5부 만에 수다가 떨고 싶어져 버린 몇 주 전 그 소요산 혼산에 비해 지인들 3 명과  무려 안내산악회 버스로 단체여행 느낌으로 산을 오르니 약간은 번잡스러웠고 즐거움은 연속적으로 찾아왔다. 역시 함께하는 산행의 장점이 혼산의 장점보다는 훨씬 많다.


두리번대는 스스로를 못 견디면 새로운 세계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라는 말을 아는가. 모르겠지 내가 방금 쓴 거니까. 그 썰로만 전해 들은 안내산악회 버스는 프라이버시만 포기되었지 등산 전후의 미치도록 안락함이 있어 단체여행의 위험을 무릅쓰고 가담한 보람이 있었다. 앞으로 가끔 또는 자주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면 나의 침실이 기다리고 있는듯한 안내산악회를 이용할거같다.


왼쪽부터 술먹은자, 날샌자, 나이든자


가지산 정상에서 가지의 매끈함을 기대하지 말라


산으로 오가는 내내 유튜브시청 개꿀


산정상에서 누군가 끓여준 라면을 사먹을수 있는 가지산장입니다.
르네마그리트풍 혹은 화투장풍의 이런 이미지는 인스타에 박차를 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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