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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렉스키드 Oct 05. 2023

누구나 아파트를 살 필요는 없다. 나도 그랬다.

그렇게 서울에 집을 사게 되었다#2

길 건너편에 버스가 온다.

뛰어서 타면 집에 갈 수 있고, 횡단보도의 점멸 신호가 켜졌다.

굉장히 간단한 상황임에도 내 행동을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그맘때 나는 늘 '다음 버스를 타는' 삶이었다.


충분히 뛰어서 탈 수 있을 때도 그냥 의례히, 다음 버스를 탔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작은 열심에 대한 가치를 너무 우습게 여겼고,

그렇게 작은 것들이 쌓여 큰 결정에 대한 최선을 다하지 못하게 됐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결혼하고 나서 바뀐 것? 뼈를 깎는 노력으로 "작은 것에도 최선을" 다하는 습관을 만들었다. 삶의 어떤 부분에서도 결코 두번의 실수는 없다는 생각에.


아내가 생각지 못한 "최악의 선택"으로 신혼을 시작했다.


따스한 봄날의 기억처럼, 우리의 첫 시작을 밝혀준
좋은 추억으로 가득하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나는
아내가 생각지 못한 "최악의 선택"으로 신혼을 시작했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2016년 가을, 공인중개사를 따라 여기저기 다녔던 기억,


두번째 방문때는 와이프가 비타500도 한박스 사가서 부동산 여 사장님께 환하게 웃으며 주던 기억이

방문한 집의 구조와 구성원들의 표정, 그리고 그날의 날씨와 상반되는 내 타들어가는 마음들.


나는 그때 왜 이렇게 어리고 둔했을까, 현실에 대해서.
조금만 더 현실을 알려주는 어른들을 찾아갈 껄.


그때 집을 사지 않았던 내 선택에 대한 미안함이 무조건적으로 크지만,

난 정말 그 돈을 주고 아파트를 사고 싶지 않았다.


아니, 두려웠다. 사자마자 떨어질 것이.
시작부터 빛(대출)을 크게 안고 가는 것이.


이미 연초에 비해서 돈이 많이 올랐다는 것,

4월에만 와봤어도 훨씬 괜찮았겠다는 아쉬움들(그때 갔으면 집값은 안오른다고 안샀을수도)을

안고 의욕이 충만한 여자친구와 일정을 잡고 주말에 집을 보러 갔다.


그 힘들던 스드메, 웨딩 촬영, 식장 선택 등 왠만한 것을 다 끝내고

이제 쉽게 가겠다라고 했지만 내가 살 집을 고르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

(전세냐 자가냐의 고민도 안 끝났던 상황.)


시간은 자꾸 흐르는데, 나는 결정을 못내렸다.


왜냐고? 이런 생각들이 머리에 가득 차 있었다. 이런 태도들이.

감히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예산의 큰 규모

적금 외에는 어떤 투자도 안해본 경제 알못

빛(대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터부시하는 선비 마인드

마음은 개포/일원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어린 마음

두려움. 언제 내 돈을 잃을지 모른다는.


굿윌헌팅의 명대사, 왜 그때는 기억하지 않았을까? "아무도 도전하지 않는 세상에 혼자 살면서 상처받지 않으려 노력하는.." 더 나를 내던졌어야한다. 만회할 시간이 더 있던 그 때.



기억에 남는 몇가지 아파트들, 그리고 순간들.


1. 재건축을 생각하며 실거주, 당산 A아파트

- 복도식 아파트를 들어가 현관을 여니, 방 2개에 거실겸 부엌이 있는 좁은 집

- 좁은 집에 조명을 굉장히 잘해놔서 보니, 나중에 여자분이 아버지가 조명을 하셔서 달아주셨다 나가는 날짜 맞춰주시면 이거 드리고 가겠다 등

- 아파트 주변에 뭐가 없고, 특히 밤에 가니 을씨년스러웠던 기억. 아무래도 재건축을 바라보니.

- 그래도 금호동 20평에 전세사는 친구네 아파트도 떠오르고, 생각보다 cozy한 느낌은 좋았음


2. 재건축 등 투자 이슈는 없어도 큰 집, 당산 B아파트

- 34평형 아파트

- 2000년대 지은 브랜드 아파트라 비교적 쾌적

- 가격은 좀 나가지만 실거주용으로는 훨씬 나아보임

- 이미 많은 사람이 보러왔는지, 큰 딸(대학생 쯤 되보임)이 엄마한테 또 보는 집 있냐고묻고 오후에 한팀 더 있다니까 짜증을 내던 기억이 남. 내심 아 이정도 가격에 조건이면 인기가 있는 아파트구나라고 생각.


3. 도화동 언덕위의 C아파트

- 공덕역에서 걸어갈 수 있고, 마을버스도 탑승 가능함

- 가격과 공덕역 앞인 점은 마음에 들었음(확실히 당산쪽이 평지 메리트)

- 와이프가 임신해서 만삭이면 눈오는날 구르기 좋은 언덕이라고 생각하여, 거부




사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었다.


마음에 들려면 예산이 많이 올라갔겠지.

전편에 언급했듯이 “자산을 사서 가치가 올라가면 팔고 더 좋은 걸 사는” 부동산 투자의 마인드가 0에 수렴하다보니.. 갭으로 사서 전세를 주는 등의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나중엔 아파트를 안사면 결혼을 못하나 라는 식의 비겁한 비관론까지 생각하게 됐다. 우리 엄마도 빌라 사시는데 내가 이 돈 내고 아파트에 가야되나 싶기도 하고(물론 엄마가 사는 빌라는 그 동네에서 제일 좋은, 2000년대 초중반까지 유행한 아파트형 빌라였고 더 중요한건 엄마는 개포동 재건축을 들고 있었다!)


문제는 다 개포동 재건축, 이 놈 때문이다. 매수한게 언젠데 도대체 입주는 커녕 10년 넘게 진척이 안보이는, 큰 돈이 묶인 채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을 보니까 더욱 ‘아파트를 사지 말자’는 자기 확신에 불씨를 지피는 것이었다.


K-장남으로써 약간 그런게 있다.

결혼을 준비하거나 경험한 남자분들은 조금 이해하실지 모르겠는데,

바로 "엄마 아빠보다 좋은 집을 사는 것에 대한 부담"

야이 멍청아 엄마 아빠는 개포동 재건축이 있었다고


이해 못하겠다고? 그런게 있다 솔직히.

아빠가 피땀흘려 모은 돈으로 어느정도 도와주시는데(이럴 시간에 얼마를 도와주실지나 물어보지!), 내가 더 좋은 아파트를 사는게 가능한가(이래놓고 아파트를 전세로 들어가는 한심함)


답답한 아들 참 많이 본다

이제는 내게 주변에서 결혼 준비할때 집을 사는 것에 대해서 이런 저런 어드바이스를 구하는 후배들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답답한 예비 남편 때문에 힘들어하는 경우들을 많이 본다.


놀랍게도, 하나같이 우유부단한 것이 당시의 나와 같다.

다른게 있다면, 심플하게 말할 수 있다. "상황이 다르다"는 점.

그들이 작년 봄여름에 남편을 설득해서 샀다면 지금 좀 힘든 시기일 수 있다는 것(하방배팅 성공)

나는 여자친구를 설득해서 안샀다가 견디기 힘들만큼 힘든 시기를 맞이했다는 정도(하방배팅 대실패)


내 꿈을 위해 달려줄 줄 알았던 택시는, 알고보니 지옥행 급행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생의 그런 무기력감은 처음 느낄 수 있었다. 언제까지? 2년 뒤 집을 살 때까지.




당산역 Zoo 커피. 바로 여기에서 결정이 났다. 여자친구는 좌절했다.


가을 햇살이 좋은 어느 날, 당산역 ZOO커피에서 만나 매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최종결정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여자친구는 얼마가 필요한지, 집에서 얼마를 도와주고 내가 그리고 그녀가 얼마를 모았고 그러면 얼마의 대출이 필요하다는 식의 예산에 대해서 종이에 쓰면서 얘기했고, 나는 한달이 조금 안되게 고민한 답변을 늘어 놓았다.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 하는 말이면, 곧이 듣자.
알지도 못하면서 쓸데없는 고집 부리면 먼길 가는거다.


그땐 아무것도 몰랐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봐두었던 집도 한두군데씩 계약이 되고 중개인으로부터 지속 연락을 받는 상황이었을테고, 그때까지도 정확히 내 예산을 펼치지 않는 상황에 여자친구의 스트레스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괴로워지니, 길게 얘기하고 싶지는 않고, 결과만 얘기하자.

"집을 사지 못하겠다"라는 얘기를 뭔가 길게 했던 것 같다.


여자친구가 황망해하던 표정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

와이프(당시 여자친구)도 아직도 그날 생각을 하면 화가 난다고 할 정도니,


무책임하고 우유부단한 결정 하나가
꿈 많은 숙녀의 첫걸음에 큰 장애물이 된 것이다.


이치란 라멘에 나마비루, 그리고 만화 터치를 읽으며 감상에 빠지던 30대 초반의 나. 아파트 매수는 나에겐 너무나 먼 어른의 세계라고 생각해버렸다. 바보처럼.


나름 나도 당시엔 고민을 많이 했다.


결혼한 친구들 만나서 술도 많이 마시면서 물어봤고,

회사 선배들에게도 이래저래 물어보면서 자문을 구하다가,


결론은, 집을 가진 사람들은 집을 사라고 권하면서도 주장을 삼갔고,
무주택자들은 집을 꼭 사야되냐고 반문하며 반대에 큰 지지를 보였다.
이때 알았어야한다. 내가 결정해야한다는 것을.


엄마에게도 조심스레 물어봤다.

엄마랑 굉장히 친한 편(딸 같은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결정이나 고민을 엄마에게 잘 털어놓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워낙 건이 크니 물어봤다.

엄마는 "집을 해주고 싶지만 너무 비싸다. 전세금을 좀 도와줄테니 내려가면 사는게 어떠냐"

말씀을 하셨고, 나는 이것들을 넙죽 받아서 여자친구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허무하게.
타협과 설득의 여지가 없도록.


그리고 쭉 상황을 보며 답답해한 엄마가 나를 상암/북가좌에 데려가서,

역에 가까운 아파트 전세를 물어봐서 전세 계약을 했다.


아. 그때 그 아파트 매수도 있냐고 물어보셨다.
안타깝게도 당시에 매수 희망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 여자친구가 원하는 아파트 매수도 끝나고,

자신이 살아야할 신혼집도 미리 보지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전셋집을 구했다.


그렇게 북가좌동의 크지 않은 규모의 구축 아파트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와이프는 낡은 집에서 사는 불편함과 원하는 집을 사지 못한 상황에 불만이 많았지만,

나는 철 없는소년처럼 독립한 즐거움과 신혼이라는 기쁨에 빠져서 혼자 신났던,

그렇고 그런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그리고 그 하루들이 쌓여,
지옥 같은 1년이 다가오게 되었다.


전에 없던 폭등의 중심에, '집을 사지 못한 멍청한 내'가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작,

https://brunch.co.kr/@alexkidd/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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