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wins all> 뮤비 속에서 예술 작품을 보다
아이유의 신곡이 발매되자마자 뜨거운 반응이다. 특히 뮤직비디오를 두고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가고 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많이 회자된다는 것 자체가 아이유가 큰 영향력을 가진 가수라는 뜻이자, 또한 그 중심에 있는 '장애'라는 화두에 대해서 사람들이 예전보다 훨씬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나는 개인적으로 뮤직비디오 후반부에 나온 한 장면에 시선이 갔다. 두 연인이 정육면체의 끈질긴 공격을 피해 도망 다니다가 결국 옷더미 위로 옷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는 장면이었다. 아마도 뮤직비디오 감독의 의도였겠지만, 그 장면에서 나는 정확히 내가 알고 있는 한 작품을 떠올렸다.
쌓인 옷무더기들. 새 옷들이 아니다. 아이유의 뮤직비디오에서처럼, 살아있던 누군가 입었지만 지금은 버려진 헌 옷들이다.
수만 벌의 헌 옷들이 큰 산을 이룰 만큼 쌓여있고, 그것도 모자라 또 바닥에 구획을 나누어 널브러져 있다. 낡고, 해지고, 곰팡이가 핀, 아무렇게나 나뒹굴어지고 있는 주인 잃은 옷들. 그런데 작품의 제목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이다.
작가인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는 1944년 프랑스 파리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 말은 곧 그가 유년시절에 제2차 대전에서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학살을 생생히 겪었다는 뜻이다.
학살.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시기에 행해졌던 일이다. 하지만 80년대 생인 나는 그렇게 많은 수의 죽음에 대한 경험이 없다. 나의 세상은 쉽게 죽지 않는 것이 더 당연한 세상이다. 지인 한 명의 죽음에도 한동안 마음을 추스르기 어려운 그런 세상.
그런데 홀로코스트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 되는 유대인의 수는 자그마치 600만 명이라고 한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는 유년시절의 일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창가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한 명씩 셌습니다.
하나, 둘, 셋,..... 천십삼, 천십오, 천십육.... 이백만 삼천... 삼백만... 사람이 보일 때마다 한 명씩 꼼꼼히 숫자를 셌지요.
그리고 한 숫자에서 세기를 멈췄습니다. 육백만.
그때 혼자 나지막이 이렇게 말했죠.
'모두 죽었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었거나 혹은 남겨진 유족이란 삶은 과연 어떤 것일까. 죽음이 그저 공기처럼, 물처럼, 나의 삶 그 자체인 삶.
그랑 팔레의 거대한 공간에 널브러진 작품 사이를 오가면서 자세히 작품을 보면 더 많은 것들이 보인다. 할아버지가 썼을 법한 베레모, 어린 소녀의 것으로 짐작되는 작은 스웨터와 인형, 아기 포대기. 멋지게 차려입었을 때 썼을 예복과 자신의 가족을 먹여 살릴 때 신었을 작업용 장화. 이 많은 삶들이, 그 삶은 담았던 따뜻했을 사람들의 몸이, 모두 사라지고 옷만 남은 것이다.
작품의 제목인 <사람들>은 프랑스어로 'Personnes'인데, 이는 부정대명사로 쓰일 때 <아무도 없다>라는 뜻으로 쓰인다고 한다. 그 많은 삶들이 남기고 간 옷의 무더기들로 우리는 그들의 끔찍하게 슬픈 부재를 더 생생히 느끼게 된다.
그래서 옷무더기 위의 청소용 집게 포크레인이 더 슬프게 느껴진다. 독일이 유대인들을 학살할 때 '인종 대청소'라는 말로 선동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크레인이 여전히 저 높이 달려있다는 것은 아직도 세계 여러 곳에서 비슷한 청소들이 끝나지 않고 행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만 같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는 평생 동안 죽음과 그가 남긴 부재를 주제로 작품을 했다. 우리 모두는 죽는다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 사실. 하지만 그 죽음이 절대로 이런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아이유와 뷔는 어디로 간 걸까. 두 연인 이전에 수북한 옷들을 남기고 사라진 다른 사람들은 또 어디로 간 걸까. 그들을 지독하게 쫓아가던 그 큐브는 과연 무엇일까. 고통받고 쫓기던 그들은 과연 죽음으로 안식을 얻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받고 쫓기고 결국엔 사라져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슬프다.
사랑은 자신 이외에 다른 것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렵사리 깨닫는 것이다.
- 아이리스 머독
https://youtu.be/JleoAppaxi0?si=tBacOhDBnn9aoW0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