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의 노래
형의 방문을 열었다. 휑한 방 한쪽엔, 잘 개어진 이불이 있고 다른 한쪽엔 초등학생이 쓸법한 오래된 책상이 있다. 의미 없이 꽂힌 책들을 더듬었다. 노트, 토익, 철학책, 만화백과사전 우주여행. 장난감 레고. 오래된 카세트와 멋들어지게 쌓아 올린 테이프 탑. 조PD, R.ef, 유승준, 이브. 그래 여기는 의미가 있다. 잠들기 전 항상 노래를 크게 틀어 꽤나 나를 괴롭히곤 했다.
그 앞, 목석같은 아빠를 흔들리게 한 유서, 아니 편지가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
저 차이고, 잘리고, 그랬네요.
짐은 그냥 두세요.
생각을 정리하려 여행을 다녀오겠습니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니 기다리지는 마세요.
그리고 전화도 안 받아요.
그냥 좀 혼자만의 시간 좀 갖게 잠깐만 내버려 두세요.
사랑해요.
형은 이전에도 자살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손목을 그어 빨간 원을 바닥에 그렸었다. 그때 수첩엔 이런 가식적인 편지 대신 인터넷 게임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남겼었다. 멋은 없었지만, 차라리 그 편이 진정성은 있었다. 이번엔 솔직하지 못했다. 형도 무서운 게 많았나보다. 직장에서 잘렸다고 이야기 하는데 직장이 있었나, 없던 것 같다. 9급 공무원 시험에서 면접까지 갔지만 아쉽게 떨어졌다고 했었다. 이것도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형의 이별은 믿을 만하다. 결혼을 시켜 달라며 한 여자와 무릎을 꿇었지만, 엄마는 칼같이 반대했다. 백수 아들에다 백수 며느리까지 부양하기는 버거우니 둘 다 일자리를 구하고 다시 오라고 했었다.
형의 테이프 탑 속 이브가 거슬린다. 가죽 재킷, 허리에 쇠사슬, 삐죽삐죽 축축해 보이는 머리. 한국의 ‘X-Japan’이라며 90년대 말 등장했던 록밴드는 형에게는 슈퍼스타였고 나에게는 그저 화가 많은 사람이었다. 형과 같은 중학생들은 모두 젤을 발라 머리를 축축하게 하고 다니던, 화가 많던 시절이었다.
“나에겐 그대 하나 뿐이야!” 형이 울부짖듯 부른다. 이브의 ‘I’ll be there.’ 또 그 노래다. 집에서도 매일 부르면 됐지, 밖에서 또 부른다. 음을 노래하기 보다는 고함을 지른다. 우리 가족이 노래방을 올 일은 거의 없다. 가끔 온다면 오늘처럼 형이 가자고 한 것이다. 나와 엄마 아빠가 조금 거들긴 하지만 형이 눈을 찡그리며 로커가 되었을 때, 우리는 리모컨을 만지지 않는다. 그리고 조용해진다. 아침에 바른 젤이 다 풀려 힘이 좀 빠지긴 했지만, 여느 로커 못지않게 화를 낸다.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엄마는 형의 노래를 ‘소리만 지른다. 욕지거리다.’로 간단하게 평했다. 집 문을 열고, 좁은 현관에서 엄마가 멈추었다. 형의 새 신발이 헌 것으로 바뀌었다. 집에 돌아와 벗어 놓고야 알았다. 친구의 비싼 운동화랑 바꿨다고는 하는데, 이미 하얀 기운이 가신 신발이었다. 형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동안 나를 힐끔거린다. 그냥, 어떤 말도 하지 말아 달라는 눈빛이다. 방으로 먼저 들어가야지. 이내 상황을 정리한 형이 방으로 돌아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형은 닥치라며 이를 물고 말한다. 힘이 빠져 보였지만 다시 기운 내서 화를 낸다.
아, 젤이 혼자 풀린 게 아니구나.
그래서 그렇게 고함을 질렀나 보다.
형의 노래를 더 들어줄 걸...
이 생각에 형이 남기고 간 테이프를 아직 놓지 못하고 있다.
I'm so lonely I'm so lonely 그대 날 떠나간 그날 이후로
수많은 밤과 슬픈 아픔에도 너를 잊지못해 나는 혼자인 걸
그리워도 못잊어도 두번 다시는 볼 수 없겠죠
다 아는데도 그리 쉽지 않아 너를 잊지못해 나는 혼자인걸
I'll be there(I'll be there) 나에겐(나에겐) 그대 하나 뿐이야
항상 너만 꿈꾸며 살아가는 나에게로 What a feeling, I feel love
너도 알고 있잖아 많은 날이 지나도 I'll be there and I'll be there and wait for you
보컬 김세헌님의 인기는 상당했다.
GIRL의 <아스피린>이라는 명곡을 뒤로 한 김세헌 보컬을 중심으로 EVE를 만들게 되었다.
G. 고릴라가 이브의 음악적 중심이었다. 작사, 작곡 프로듀싱 등 이브의 많은 노래에 손때가 묻어있었고 이브의 곡을 좋아한다는 건 G.고릴라의 음악적 색을 좋아한다는 것과 같은 수준이었다. 한국대중음악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인물이다. G고릴라는 애주가인데 비 오는 날 곡 쓰기를 즐긴다고 한다. 그래서 노래에 유독 비가 많이 등장한다. 휘성이 불렀고 아이유가 리메이크 한 <Rain Drop>도 명곡이다. 개인적으로는 가인<a tempo>라는 곡을 좋아한다. 고릴라님 특유의 웅장한 악기 배정, 몰아부치는 곡 전개가 감정을 잘 이끈다.
https://music.bugs.co.kr/track/38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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