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한 ‘대리’ 극복기
지난번 브런치 첫 글을 올리고 감사하게도 ’에너지니‘님이 질문을 보내주셨는데요, 오늘은 그 질문에 대한 답글을 올려볼까 합니다.
오늘도 자신만의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애쓰는 모두를 응원하며.
뤠니님은 처음 접해보는 일을 배울 때 배우는 맛으로, 다음 3년은 그저 열심히 했다고 했는데 그때의 막막함을 이겨낼 동력이 있었나요? 그리고 그때의 경험이 부서 전배에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01.
보통 입사한 지 2~3년 차 지나면 첫 번째 퇴사 고비가 찾아온다. 처음엔 멋모르고 일을 시작했는데, 어느 정도 일이 익숙해지고 나니 조직 내 권력구도도 보이고, 회사 돌아가는 실정도 보이고, 제각각인 Workload도 보인다.
그뿐이랴. 이쯤 되면 내 일을 방해하는 ‘빌런’들이 반드시 등장한다. 내가 한 일로 생색내는 선배라던지, 능력도 없으면서 화만 내는 상사라던지, 일이 쌓여있는데 자기만 쏙 가버리는 눈치 없는 후배라던지… 빌런들은 눈치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나의 퇴사욕구를 자극한다.
“하아.. 지금이라도 다른 일 알아봐야 하나?”
내가 지금보다 덜 신중한 성격이었다면, 다른 동기들처럼 진작 도망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안타깝게도 돌다리도 두들겨보는 타입이었다. 아무리 현재가 불만족스럽다고 해도, 다음 스텝으로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02.
그래서 나의 전략은 ‘일단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next step을 열심히 탐색해 보는 것’이었다.
너무 단순해서 실망했는가. 그런데 이거 생각보다 쉽지 않다. 지금 일도 열심히 하면서 next step도 열심히 찾아본다? 이게 가능하려면 최소 2배는 더 열심히 살아야 했다. (그래서 이직도 부지런해야 하는 거다)
첫 번째 시도는 ‘컨설팅 펌’으로 이직하는 것이었다. 그때도 동종 업계나 동일 직무의 다른 회사로 이직은 가능했으나, 딱히 지금보다 더 좋은 조건인지 의문이었다. 빌런들은 형태를 달리할 뿐 어디에나 있을 테고, 지금 연차로는 연봉을 드라마틱하게 올리는 것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대신 컨설팅이라면 다시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마침 유명 전략 컨설팅펌에서 이직 제안이 들어왔다. 처음 직장을 구할 때는 서류도 통과 못했던 곳인데, 지금까지 쌓아온 경력과 핏이 맞는 포지션이 열린 모양이었다. 막상 제안을 받긴 했으나 면접 과정이 만만치는 않았다. 회사가 많이 바쁠 때였는데, 면접만 4번을 치르고 마지막 최종단계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두 번째 시도는 ‘변리사’ 공부였다. 이직 시도가 좌절되고 나니 ‘사무직’ 자체가 맞지 않는 건 아닐까 의문이 들었다. 당시 대학동기들은 대부분 박사학위를 땄거나, 의사, 변호사 등의 길로 접어든 상태였다.
‘그래, 나도 애초에 회사에 들어갈게 아니라 전문직을 했어야 했어’
그렇게 1년 가까이 회사-독서실-집을 오가며 팔자에도 없는 고시공부를 했다. 처음엔 외계어 같던 법조문들도 공부하다 보니 꽤 재밌었다. 그러나 역시 회사와 병행하는 건 무리였을까. 기어코 디스크가 터지면서 시험 한번 못 보고 접어야 했다.
03.
내가 본업도, 삽질도 열심히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패트릭 맥기니스의 ’ 나는 직장에 다니면서 12개의 사업을 시작했다 ‘라는 책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본업을 유지한 채 벤처 기업에 얽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을 위해서다.
갖가지 일을 시도하고, 자신에게 집중하고, 다양한 역량과 인맥을 쌓다 보면
본업에서도 더욱 효율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다.
나도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다양한 삽질들을 통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단적인 예로, 업무 특성상 계약서를 다룰 일이 많았는데, 변리사 시험을 준비하면서 법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져 복잡한 계약조항을 해석하고 협상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투잡(?) 기간을 오랫동안 유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간과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훈련이 되었다.
여전히 막막한 터널 속에 갇혀있는 기분이었지만 노력의 시간들은 배신하지 않고 나를 성장시켰다. 그리고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았을 때, 묵묵히 버텨내며 쌓아왔던 시간들이 나에게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참 진부한 말일 수 있는데,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 봄에서 바로 가을이 될 수 없듯이, 결실을 맺으려면 반드시 뜨거운 여름을 견뎌야 한다. 나 또한 이제 겨우 한 번의 고개를 넘었을 뿐, 다시 또 노력하고 버티며 다음 고개를 넘으려 애를 쓰고 있다.
그러니 너와 나 모두 지치지 않기를,
오늘도 응원해 본다.